국고 낭비 문책 두려워 신약 외면하나…“다음 팬데믹 철저 대비해야”

서울 시내 한 약국에서 약사가 뉴시스 취재진에게 코로나19 먹는 치료제인 팍스로비드를 보여주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서울 시내 한 약국에서 약사가 뉴시스 취재진에게 코로나19 먹는 치료제인 팍스로비드를 보여주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이코노뉴스=이종수 기자] 정부가 코로나19 치료제인 화이자의 팍스로비드 수십만명분의 재고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유효기간을 한 차례 6개월 연장했는데도 이마저 만료가 한 달여 밖에 얼마 남지 않았다. 26일 의약계에 따르면 팍스로비드의 경우 병용금기약물이 많아 처방률이 낮기 때문에 물량이 소진될 가능성은 낮은 상태다. 유효기간을 다시 연장하거나 폐기하는 수순 외에 묘책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게다가 이 물량 말고도 수 십 만명 분이 순차적으로 유효기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사태초기에 도입했던 팍스로비드 유효기간을 올해 12개월에서 18개월로 연장했다.

덕분에 2월까지가 유효기간이던 팍스로비드의 대량 폐기 위기를 넘겼으나, 다시 유효기간 만료(8월)가 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팍스로비드 재고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고 있다.

팍스로비드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물량은 38만명분(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액수로 수천억원에 달한다. 현 시점에서 남아있는 팍스로비드 물량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지금까지 도입한 총 전체 팍스로비드 물량은 200만명분에 이른다.

지난해 12월 30일 임숙영 중앙방역대책본부 상황총괄단장은 정례브리핑에서 “팍스로비드의 재고분이 충분하다”면서 “200만명분을 계약했고 현재까지 107만명분을 사용해 93만명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니까 8월에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팍스로비드 물량 외에도 지난해 하반기 도입한 물량 20만명분, 올해 상반기에 도입하기로 예정됐던 60만명분 등이 차례로 유효기간 만료일이 돌아오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23일 질병관리청이 내놓은 한국일보 기고 관련 해명자료를 보면 8월에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물량의 처리(폐기, 혹은 유효기간 재연장)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질병관리청의 중앙창고에 보관중인 37.3만명분의 팍스로비드의 유효기간은 올해 11월부터 내년 9월까지 순차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물량은 한국일보 기고에서 지적됐던 물량이 아니라 그 이후에 도입된 물량이다. 또 질병관리청외에 보건소와 약국 등에 보관중인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 이들 물량의 유효기간은 언제 만료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다.

팍스로비드 유효기간 연장을 한 근거에 대해서 질병관리청은 “코로나19 치료제의 경우 공중보건위기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승인된 관계로, 최초 도입시에는 다른 의약품에 비해 유효기간이 짧은 특성이 있는데, 최초 도입이후 실제 사용에 기반한 데이터에 근거하여 이후 유효기간 연장 등을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약사가 정한 유효기간을 정부가 자의적인 절차를 거쳐 변경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실제 사용에 기반한 데이터’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공개한 회의록에 따르면 지난 1월 진행된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 팍스로비드의 기존 물량에 대해 ‘조건부’로 유효기간 연장이 이루어졌다.

조건부의 내용은 유효기간 임박 제품을 우선 사용토록 조치할 것과 함께 질병관리청 또는 보건소에서 보관상태를 확인 후 적합한 제품만 유효기간을 연장해 사용토록 하고, 적합 제품에 한정해 유효기간 연장 라벨링 작업을 실시하도록 했다.

‘보관상태 확인 후 적합한 제품’이라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최근에도 질병관리청은 팍스로비드 처방 독려에 나섰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19일 팍스로비드의 예방효과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요양병원·시설 환자 등 60세 이상 환자의 중증화 및 사망 예방을 위해 확진 초기 치료제를 적극적으로 처방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병용금기약물이 많아 처방을 꺼려온 팍스로비드 특성을 감안하면 이 같은 당부는 별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요양병원·시설 입소 노인 대다수가 혈압약 등을 복용하는 고령자라 팍스로비드의 적극적인 처방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재고 처리에 안간힘을 쓰지만 옳은 방향은 아니라는 얘기다.

동네 가게에서 파는 각종 식품류라 할지라도 유효기간이 하루라도 지나면 사먹기를 꺼린다. 하물며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약이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려는 치료제인 만큼 일반 식료품보다 훨씬 까다롭게 안전성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부가 저조한 투약률 때문에 남아도는 팍스로비드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꼼수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정부가 팍스로비드의 유효기간을 늘리고 처방률을 높이려는 것은 국고 낭비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범용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있는데도 재고 처리 때문에 ‘긴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일본 시오노기제약의 조코바
일본 시오노기제약의 조코바

일본 시오노기 제약의 코로나19 치료제 조코바에 대해서도 이런 이유로 긴급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임숙영 중앙방역대책본부 상황총괄단장은 지난해 12월 30일 정례브리핑에서 조코바의 긴급사용승인 거절 이유에 대해 “임상효과, 안전성, 약품 정보, 해외 동향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면서 ”팍스로비드의 재고분이 충분하다는 점도 고려됐다”고 덧붙인 바 있다.

현재 현대바이오는 범용 항바이러스제로 개발한 제프티(성분명 CP-COV03)가 한국인 대상 최대 규모(300명) 코로나19 임상에서 조코바를 능가하는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했다면서 긴급사용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의료·제약바이오 학계는 올 가을과 겨울에 코로나19 재유행을 예상하고 있다. 새로운 변이인 오미크론 XBB 변이 바이러스가 주도적으로 유행할 것으로 예측하지만 이 변이는 면역 회피 능력이 뛰어나 기존 백신과 치료제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위기가 한차례 지난 것 같지만 더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

많은 나라들이 코로나19 대응에서 실수를 반복해 왔다.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워낙 급박하게 팬데믹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과거의 실수를 거울삼아 다음 팬데믹을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효과가 탁월한 치료제가 없는지, 행여 수요예측 실패와 국고낭비에 따른 문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약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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