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일 만에 헌법 개정 추진 의사를 밝히며 정치권에 화두를 던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 19일 여야 5당 원내대표들과의 오찬 회동에서 대선 공약대로 개헌을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다. 취임 열흘 만에 지난 10년간 보수정권이 한 일과 맞먹는 ‘좋은 일’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더니 어려운 개헌도 별로 ‘힘주지 않고’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간 개헌은 국민들의 의사보다는 대통령을 핵으로 한 정치권의 정략적인 판단에 의해 추진돼 왔다. 이승만의 사사오입개헌부터 박정희의 유신, 전두환의 7년제 단임 개헌, 노태우의 6.29선언에 의한 직선제 개헌 등이 그것이다.

지난 대선에 앞서 각 당의 개헌논의도 마찬가지였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무마하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불쑥 개헌안을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물거품됐다. 이후 각 당은 개헌을 빌미로 빅텐트론 등 불쑥불쑥 ‘화두’를 던졌다.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처음에는 개헌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다루는 분위기가 진지하지 못하다고 개헌논의를 선거이후로 미루자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로부터 ‘대세론을 지키기 위한 부자 몸조심’이라는 비난을 받자 정식으로 개헌입장을 밝혔다.

2022년 대선부터 대통령 4년 중임제로 전환할 것과 이를 위해 2018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자는 것이었다.

문 캠프는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과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도 함께 제안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성이 제대로 반영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정부의 입법을 최소화해 국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책임총리·책임장관제를 시행해 대통령 권한을 분산시키자고 했다.

문 대통령이 4년 중임제 대통령제를 선호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권력 분점을 노리는 야당들의 이원집정부제 개헌주장과 맞물려 큰 쟁점이 될 것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청와대 상춘재에서 5당 원내대표와 첫 오찬 회동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동철(오른쪽부터) 국민의당 원내대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재인 대통령,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뉴시스 자료사진

문 대통령이 이번 회동에서 내년 개헌추진을 서둘러 밝힌 이유는 뭘까?

엄청난 내용임에도 언론들이 이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아직 언론과의 ‘허니문’기간이라 그런지 여야회동의 모양새와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구성 등을 크게 보도했다.

지금까지 정치권의 개헌 논의 과정에는 항상 정략적 꼼수가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보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정직과 성실’의 아이콘이라는 문 대통령의 개헌논의는 정략적 차원이 아닌 것 같다.

문 대통령은 국민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 반영하고 선거 제도 개편도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야당의 선제공격을 미리 차단한 셈이다.

그는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안을 처리하겠다며 "개헌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국민이 주체로서 개헌 논의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정치권이 의견 차이로 개헌안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하더라도 정부 차원에서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그러나 야당들은 정부 주도보다는 국회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확고한 개헌언급’에 야당대표들도 놀란 것 같다. 실제로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는 "일반적으로 후보 시절에는 개헌을 약속하고 당선이 되면 이런저런 바쁜 일이 있다고 해서 넘기는데 문 대통령이 먼저 말씀하시기에 진정성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도 “국회에 개헌특위가 만들어져 있으니까 정부에서 구태여 개헌특위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씀 드렸으나 문 대통령은 “국민 주권적, 또 국민 합의를 얻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대선 전 민주당을 뺀 나머지 당은 이미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한바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하다 눈물을 흘린 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문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추도식에서도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담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이 내용도 대선기간 중 개헌 공약이었다. 민주주의 정신과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하는 개헌의 구체적 내용 중의 하나였다.

헌법 전문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 새기기, 생명권, 안전권, 성평등권 보장 및 정보기본권 신설, 언론 자유와 공공성 보장, 기업의 사회적 책무 강화 등이다. 이외 자치분권 실현을 위한 4대지방자치권 보장도 들어있다.

문 대통령은 이번 회동에서 "국론이 모아지면 제 공약을 고집하지 않고 국민의 의견에 따르겠다"라고 강조했다. 그동안은 개헌 카드가 대통령을 압박하는 야당의 전략적 '무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대통령이 먼저 야당을 상대로 개헌 의제를 제시해 미리 카드를 선취한 모양새가 됐다.

이번 개헌 약속으로 문 대통령은 적어도 1년간은 국정추진과 관련해 야당의 가장 큰 카드를 무력화시켰다. 언론도 국민도 아직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당분간은 개헌 논의보다 경제안정과 적폐청산 등에 관심을 둘 것이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개헌 얘기 하기가 시기상조로 보이지만 이번 언급으로 ‘공약준수 의지표명’과 ‘야당의 입막음’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것은 분명하다. 멀리 있는 개헌보다 당장 민생을 위한 협치를 펼쳐가야 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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