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시사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준수는 강원도를 향하는 내내 말없이,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우리 미취업자들의 일상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 김선태 편집위원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 「낮은 곳으로 임하라」 중

작가가 서두에 밝혔듯이,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달달한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는 우리 이웃이다. ‘벚꽃 흩날리는 이유’에서 나이 53세인 검도 도장 사범은 소녀시대 태연에게 안티의 댓글을 날렸다는 이유로 중학교 아이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고소당했다. 문제는 그가 ‘태연 양’의 일이므로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합의를 권하는 형사에게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라고 반문하면서.

‘낮은 곳으로 임하라’에서 주인공은 같은 백수인 대학 동기를 따라 나섰다가 난처한 상황에 봉착한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고랭지 배추를 기르는 아버지에게 사업 자금을 얻으려 한 친구가 주인공을 이용해 먹은 것이다. 일당을 받아 줄 테니 배추 출하를 도와달라는 친구 말에 망연자실한 속에서도 주인공은 목소리를 낮춰, 덩달아 자신의 몸도 낮춰, 묻는다. “그래, 일당은 얼만데?”

태어나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보지 못했던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여덟 살 연하의 운전면허학원 사무보조원 주경 씨와 데이트를 하게 된 이야기. 두 번째 데이트를 무난히 넘긴 주인공은 호젓하고 돈도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강원도 중소도시 외곽의 동물원을 데이트 장소로 택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토끼나 오골계들이 우리 밖에서 풀을 뜯었고, 원숭이들은 두 사람을 보고 아우성을 질러 댔다. 반달가슴곰 축사에 이르러 사단이 났다. 곰들이 굶주린 아이가 구걸하듯 울부짖었던 것이다.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 이기호 저, 마음산책. 2016.2. 25.

아내가 사라져버린 기괴한 이야기는 가만 되짚어보면 이유가 남편의 무능함에 있음을 서서히 알게 하는 블랙 코미디다. 아내가 베란다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단순히 열대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쉰두 살 가장은 두 자식 먹여 살리기 바빠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틈을 갖지 못했다. 아내의 베란다 생활은 점점 심해져서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TV를 볼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아내가 베란다에 티셔츠 한 장 널어둔 채 사라졌다. 아이는 엄마가 빨래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데, 남편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제목이 그럴싸한 ‘미드나잇 하이웨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 산소를 향해 달리던 나는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경부고속도로 어느 ‘졸음 쉼터’에 차를 세웠다.

투명테이프로 차 문 유리창을 빈틈없이 막은 뒤 조수석에 놓인 번개탄에 불을 붙일 찰나, 옆에 다가 선 트럭에서 내린 사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라이터를 빌려갔다. 소주 한 잔 마시고 떠난 아내를 생각하는데 이 인간이 이번에는 간고등어를 사라는 것이다.

무시하고 또 앉았는데 그놈이 다시 문을 두들기며 나와서 고등어나 구워 먹잖다. “어차피 라이터 없이 번개탄 붙이기도 어려울 텐데”라며.

카드 값 때문에 화가 난 아내가 무서워 산속 구덩이에 침낭을 깔고 노숙생활을 시작한 주인공 이야기에 이르면 차라리 이 모두가 우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별은 좋겠다. 카드 값 걱정 안 해서……” 이 대목에서 독자는 엄연한 눈앞 현실로 소환되고 만다.

침낭 속에서 그는 가만히 별을 바라보았다. 별은 좋겠다, 카드 값 걱정 안 해서……. 그는 괜스레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달빛은 은은했고, 주위는 놀랄 만큼 조용했다. 휴대전화 배터리는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는 아내가 보낸 마지막 문자를 떠올렸다. “그만 돌아와, 다음 달부터 잘하면 되지. 내일 막내 체험학습 가야 한단 말이야.”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이번엔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또 혼잣말을 했다. 달은 좋겠다, 다음 달에도 그냥 달이어서.

― 「도망자」 중

그밖에 사흘 알바 뛰어 기껏 번 돈 20만원에서 12만원을 숙식비로 뺏겨버린 청년, 치킨집에서 화재 사고를 겪은 뒤 고시원에서 전원 코드를 뽑아놓고 설거지하는 사내, ‘초간단 또띠야 토스트 레시피’라는 케이블TV 속 셰프 말만 믿고 소주병으로 밀가루 굴리다 병을 깨버린 백수, 모두 우리의 서글픈 이웃들이다.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실, 또는 벗어날 길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40편에 걸쳐 일일이 다른 각도 다른 시점에서 보여 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저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에서

이야기는 대개 웃거나 우는 걸로, 적어도 독자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걸로 끝나지만, 새삼 나와 우리 주위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위에서 국정농단으로 나라를 말아먹어도 한참 말아먹는 사이, 아래에서 서민들은 하루하루 어쩔 줄 몰라 헤매고 있다 생각해보라. 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겠는가. 이 화가 얼마나 쌓여가고 있겠는가.

※ 김선태 편집위원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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