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다른 나라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는 동안 정작 미국의 부와 힘, 그리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한 분노의 물결에 힘입어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세계화의 최대 피해자가 미국인 것처럼 울분을 토했다.

▲ 최성범 주필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도 안 돼 지난 1월 22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재협상을 전격 선언한 뒤, 이튿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세계화에 반(反)하는 일련의 조치를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는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국이 주도해서 밀어붙인 일이다. 1991년 구소련 체제가 붕괴하자 자신감이 생긴 미국은 세계 경제 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기로 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당시 미국은 경제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1980년대에 자동차 전자 등 주요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과 독일에게 경쟁력을 상실하고 막대한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어서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국으로선 일반 제조업에선 도저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있는 분야가 있었다. 바로 농업과 서비스업(금융 및 정보통신)이었다.

이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만들어진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대폭 보완해 농업과 서비스 교역에 관한 국제 규범을 대폭 보완함으로써 농업 및 서비스 교역이 증대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동시에 관세율의 점진적 인하를 추진했다.

이와 함께 GATT 체제를 사실상 대체할 새로운 무역기구를 창설했다. 바로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다. 한마디로 WTO 체제는 미국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무역체제이고 가장 득을 본 나라도 미국이다.

사실 오늘날 세상은 이 때 만들어진 질서에 의해 규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NAFTA는 미국 제조기업들이 멕시코의 싼 인건비를 활용할 수 있는 다자간 무역협정이고, TPP는 중국의 급성장에 맞서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기구라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다.

최대의 수혜자이자 창설자가 최대의 피해자로 바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순한 피해자 코스프레든지 정치적 문제라고 봐야 하나?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질서로 여기고 이에 적응해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찌 해야 하나?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앞에서 취임선서를 한 뒤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워싱턴=AP/뉴시스 자료사진】

역사적으로 보면 자유무역주의는 강대국이 주창하고 보호무역주의는 후발주자가 고수하는 게 관행이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영국은 자유무역을 주창했고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경쟁력이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 경제는 아직 압도적인 세계 최고다.

전통적인 제조업이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막강한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등장해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최근 20년 사이에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테슬라 등이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최근 경제성장률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오히려 높은 편이다.

사실 알고 보면 제조업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1990년대 초반보다는 낫다.

따라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움직임은 자유무역 체제 하에서 미국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필자는 분배구조의 왜곡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2010년 미국 전체 가계 소득 증가분의 93%를 상위 1% 부자가 차지했다고 한다. 지난해에도 상위 1%의 수입은 5.5% 늘어난 반면 하위 80%인 9600만명의 소득은 1.7% 감소했다고 한다.

▲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 이민정책 등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AP/뉴시스 자료사진】

소득불균형 수치인 '지니 계수(GINI Index)'는 0.47로 1967년 조사를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상위 계층의 소득이 주로 주식에서 생기는 반면 하위 계층의 소득은 근로소득이라는 점에서 주주 중심 자본주의가 문제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비롯한 집권세력이 비난의 화살을 교묘하게 자유무역으로 돌린 셈이다. 정확하게는 신자유주의 내지 월스트리트 자본주의의 문제를 자유무역의 문제인 것처럼 호도한 셈이다.

자유무역의 과실을 월가 중심의 소득 상위 계층이 다 가져가고 그 피해는 제조업에 종사하던 하위 80%가 짊어진 셈이다. 결국 해법은 월가 개혁에 있지만 월가 출신이 대거 입성한 트럼프 내각은 자유무역체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선동의 결과다.

어쨌거나 상황은 좋지 않다. 보호무역주의가 세계에 좋은 결과를 가져 온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공황 직후 국내 산업을 더욱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최고 400%의 관세를 부과한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제정했지만 시행된 지 3년 만에 세계 무역은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 민주당의 2016년 정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극도로 심한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이 미국인들과 미국 경제에 나쁘다고 믿는다. 우리 경제는 중산층이 번영을 누려야 성장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 상위 0.1%가 전체 미국인 소득의 90% 가까이 가져간다. “우리는 공정 경제를 위해 월가의 탐욕과 방종에 대항해 싸운다. 우리는 월가가 일자리 창출과 생산적인 경제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