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주말 고향의 초등학교 재경 동창회 신년 산행을 갔다. 강추위에도 40여명이 나왔다. 50~70대 선후배 모임이라 보통 서울 근교의 낮은 산 둘레길을 2시간 정도 걷고 정상에서 간식을 한 뒤 오후 3,4시쯤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정상 주위에서 간식을 먹을 땐 몇몇 기수들이 모여 집에서 가져온 간단한 빵과 부침, 과일 , 족발 등으로 허기를 달랜다. 간단한 찌개류와 컵라면에 한두 잔 ‘정상주’도 곁들인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이번 산행에서는 단연 삶은 계란이 인기 만점이었다. “이렇게 귀한 달걀을...” “이게 말로만 듣던 미제 계란인가?” “살다보니 이젠 쇠고기에 이어 태평양 넘어온 미제 계란까지 먹다니 우리나라 대단한 나라야" 등 말 풍년이다.

이어 어릴 때 달걀에 대한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서 두 세 마리 닭들을 키워 아침마다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와 엄마에게 바쳤던 일, 달걀 후라이는 아빠와 큰형 밥상에만 가끔 오르고 나머지 식구들은 파를 넣어 계란찜으로 먹었던 일 등등.

삶은 계란은 운동회와 소풍 때나 먹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열차에서 사먹던 달걀 노른자와 사이다 맛의 조화는 일품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이후에는 공장형 축사에서 대량생산돼 어디서나 계란이 제일 많이 먹는 국민 단백질 공급원이 됐다. 급기야 비만과 고혈압, 고(高)콜레스테롤을 걱정해 계란 노른자가 기피 식품이 되기까지 했다. 달걀 한판(30개) 값이 골프공 1개 값 정도였으니 가장 싸면서도 좋은 영양공급원이었다.

우리말 표현에 ‘호랑이 어금니같이 아끼는 물건’이니 ‘알토란 같다’, ‘달걀 노른자 같이’라는 관용구(어)는 원래 가장 귀한 것을 표현할 때 쓰이곤 했다.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 파동으로 3,400만 마리가 넘는 산란계가 죽어 요즘 들어 천대받던 ’달걀 노른자‘가 제값을 받는다. 가정식보다는 식빵 카스테라 케이크 등 빵집이나 비스킷 유과류 등 제과공장이 원가가 올라 난리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계란 필요량이 4,300만개인데 설을 앞두고 수입이 불가피하다.

계란값이 ‘닭의 해’인 정유년 설(28일) 앞에 물가를 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얼마 전 미국산 쇠고기가 가뭄으로 피해를 본 호주산을 제치고 수입 1위를 탈환하더니 설 전에 계란까지 800만개가 들어왔다.

지난 23일부터 대형 마트 등에서 한판에 8,190원의 가격에 판매된 미제 ‘하얀 계란’은 한 알에 330원이다. 포장마차에서 삶은 계란 3개에 1,000원하던 것이 2개로 줄었다. 공급원을 마련 못한 곳은 아예 계란받기가 힘들단다.

심리적 ‘계란파동’이다. 강추위에 계란 값이 오르자 채소류 음료수 값이 따라 오르더니 유가상승을 핑계로 휘발유 값까지 올라 체감추위는 더 하다.

계란이 설에 지짐이나 부침에 들어가는 기본재료라 주부들이 걱정이다. 한 살 더 먹는다는 떡국에 계란지단이 없으면 뭔가 빠진 것같이 허전하다. 만두 속 만드는데도 필요하고 만두피 반죽에도 꼭 들어간다.

▲ 18일 오전 서울 식품명인체험홍보관에서 한국농수산유통공사(aT) 주최로 열린 '전통식품과 함께하는 aT 설 차례상 차리기'에서 신광수 명인이 어린이들에게 차례상 설명을 하고 있다. /뉴시스

계란 수입은 이번이 두 번째다. AI가 창궐했던 2014년 6~9월 미국산 생달걀이 들어와 대란 30알 기준 4만원으로 지나치게 비쌌다. 껍질이 없는 알이나 노른자, 흰자 형태로 분리된 달걀(액란)은 이미 수입되고 있는데 꽤 싼편이다.

지난해에는 이탈리아, 중국, 미국 등에서 ‘새의 알’(껍질이 붙지 않은 것) ‘알의 노른자위’(신선한 것, 건조한 것, 물에 삶았거나 찐 것, 냉동한 것 등)라며 수입돼 국산보다 싸다.

달걀 수입이 늘면 소비자들이 직접 사먹는 일반 생달걀보다 과자·빵 등 가공식품 등에 쓰이는 원료용 달걀 시장이 더 큰 타격을 입는다. 당장 유통기한 문제 탓에 비행기로 실어 와야 하기 때문에 생달걀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향후 AI 파동이 지나도 한 번 시장이 개방되면 계속 수입산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항공운임이 비싸 날계란은 어렵더라도 액란 시장은 계속 늘어나리라는 전망이다.

그런데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동남아 등 가까운 나라가 아니고 태평양 넘어 왜 미국산인가.

이번에야 설 특수가 급해서 그렇다지만 한 두달 냉장 상태로 보관이 가능한 계란인데 아시아 쪽에서 배로 가져 오면 될 텐데 왜 굳이 먼 미국에서 비행기로 가져올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따라 미국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선수를 친 건 아닌가. 알아 보니 달걀은 지정 검역물이어서 수입할 수 있는 국가가 제한되어 있단다.

우리가 먹는 쇠고기 등심살은 미국 캐나다 스페인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만 수입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광우병이나 기타 축산물 관련 질병으로부터 안전한 국가들만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 같은 나라에선 수입이 불가능하다. 인체가 AI에 감염돼 이번 겨울에 14명이나 목숨을 잃은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발생 건수와 치사량은 적지만 같은 조류독감 발생국인 일본에서도 들여올 수가 없다.

계란값보다 문제는 생명이다. 이 땅에서 너무 많은 생명이 죽어 나간다. 재작년 세월호 참사, 지난해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파동 등 어처구니없는 인재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구제역 파동 때는 구덩이를 파고 지하수 오염을 우려해 비닐을 깔은 뒤 산 돼지들을 던져 넣었다. 이때 버둥거리며 기어 나오려는 몸부림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마음이 불편했다.

▲ 23일 서울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한 주부가 '계란 대란'의 해결사로 수입된 미국산 흰색 계란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다./뉴시스

AI는 거의 2, 3년을 주기로 반복돼 언 땅을 파고 닭을 산 채로 묻는다. 이 ‘살처분’으로 지하수가 오염된다. 애꿎게 희생되는 닭은 물론 인간도 피해를 입는 것이다.

2003년 국내에서 AI가 처음 발생한 이후 2006년, 2008년, 2010년, 2014년, 그리고 이번 2016년 등 10년 이상 반복되지만 당국은 여전히 철새 탓만 한다.

3년 전인 2014년 3월 1,200만 마리의 닭을 살처분할 때 범 종교 및 각계 시민사회단체 공동으로 ‘AI 살처분 방지 및 제도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당시 “조류독감 발생 요인을 차단하는 근본적인 대책으로 공장식 밀집사육과 케이지(cage) 사육을 단계적으로 폐기 개선하고, 동물 사육환경을 개선할 최소 한도의 행정 인프라를 구축하여야 한다”며 예방백신 도입 등 10개항을 당국에 건의했다.

이들은 그때도 “지난 10년간 정부는 동물사육 환경에 대한 단 한건의 조사도 행하지 않았으며, 단 한 건의 개선을 위한 행정 조치를 취한 일이 없었다”고 정부의 무대책과 안일주의를 비판했다.

이번에는 3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운 닭들이 죽었다. 이 땅에선 사람이든 가축이든 ‘개죽음’으로 목숨 값이 점점 더 싸지고 있다. 반성은커녕 말도 안되는 논리로 국민을 분노케 하는 대통령만 탓할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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