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시사비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골프라고는 쳐본 적도 없는 처지에 이렇게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골프 입문자에게 가장 중요한 용어 중 하나가 ‘스탠스(stance)’라고 한다. 공을 맞히기 위해 취하는 위치와 자세를 말하는데, 평소와 달리 스윙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는 십중팔구 스탠스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탠스가 정치 용어로 사용되면 주위 여건이 변할 때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나 표방해야 할 태도 또는 답변해야 할 입장을 뜻한다. 예를 들어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유엔에 있을 때는 보수나 진보 같은 특정한 정치적 위치에 설 필요가 없고, 자신을 향한 이념 공세에 어떤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현실 정치에 몸 담기 위해 국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떤 식으로건 스탠스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골프에서는 이런 스탠스가 맞지 않으면 저런 스탠스를 취해도 된다. 하지만 정치에서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된 문제에서 스탠스가 바뀌면 대중들은 반드시 해명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 ‘바이오그래피 매거진(Biography Magazine) ISSUE. 8: 안희정’ = 편집부. 스리체어스. 158쪽.

“민주주의 근간은 정당정치”라는 당위의 한계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정당을 떠나 설명되기 어렵다. 헌법에 정당을 제대로 명시하지도 않은 일본과 달리 우리 헌법은 정당을 총강 8조에 두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명문화할 정도로 정당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와 달리 한국의 정당 체제가 영미 대륙과 비교할 때 매우 취약하게 운영되어 왔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보스 정치, 철새 정치인, 정치적 야합 같은 표현들은 이처럼 부실한 정당 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들이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정당이 뭐가 중요한가? 국민이 없고 나라가 없는데…”라고 한 반기문 총장에 대해 안희정 충남지사가 “기회주의 정당정치를 하는 것이 문제”라며 직격탄을 날려 화제가 됐다.

안 지사만큼 정당 문제에 공을 들이는 대권 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상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다양한 경로로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강조해 왔다. 그간의 발언을 종합하면 안희정에게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를 빼고 설명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으며, 이 점이 여러 대권 주자 가운데 그가 차지하는 고유의 ‘스탠스’라 볼 수 있다. 탄핵 국면을 맞으면서 안희정의 이와 같은 스탠스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묘한 파장을 낳을 전망이다.

객관적 스탠스로 보면 그는 소속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적임자임이 분명하고, 향후 대선 국면에서 여권의 바람몰이에 맞설 조직력의 중추가 되어야 할 과제까지 떠안고 있다. 충청 민심을 장악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 정당 시스템의 취약성이 그에게 그리고 야권 전체에 덫이 될 가능성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 가령 이런 점이다. 안 지사가 정당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탓에 당내 경선에 대비한 자신의 ‘캠프’를 제대로 꾸리지 않을 경우 순위에서 밀려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럴 경우 당내 지위가 하락하여 대선 과정에서 적절한 역할을 맡기 어려울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신의 진보 이념으로 지지자를 강력하게 집결하여 대선 후보에게 외연 확장의 길을 터주어야 하는데, 당의 중추가 부실하다면 후보와의 역할 분담도 쉽지 않아진다.

반면 민심의 이반을 잘 알고 있는 상대 후보 진영이 똘똘 뭉쳐 사생결단의 노력으로 지지자들을 투표장에 끌고 나온다면 결과는 매우 복잡해질 것이다. 우려를 더하자면 어떤 정치인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야당은 선거에서 여당과만 싸우는 게 아니라 지배연합과 싸운다. 그 지배연합이 한국 사회의 물적 기반을 다 가지고 있다. 야당은 후보 개인의 역량에 기대는 선거를 치르지만, 여권은 지배연합이 갖고 있는 역량의 총체를 통해 개인의 열세를 만회한다.” 더불어민주당을 제외한 세력들이 단일 중도 후보를 내세우는 다소 극단적인 경우도 상정해야 한다.

▲ 2009년 봉하마을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 운구 행렬.

“폐족(廢族)”의 원칙주의, 정권교체에 걸림돌?

안 지사의 이력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런 우려는 더욱 커진다. 이와 관련 매 호마다 명사 한 명을 선정해 싣는 인물 전문 잡지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 안희정 지사의 삶과 철학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편집자는 ‘더 좋은 민주주의’를 주창해 온 안희정 지사가 “민주주의를 세 단계로 경험했다"라고 풀이한다 즉 “젊은 날에는 혁명의 이념이었고, 30대에는 정치 제도였으며, 이제는 사상과 철학에까지 닿아 있다"라는 것이다.

“친노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안 지사가 2007년 대선 패배 후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불렀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자신들 역시 국민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처지라며 한 말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 불경에 대해 스스로 단죄하겠다는 참담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안희정은 누가 뭐라 하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행정가로서, 또는 정치인으로서 대안을 모색해 왔다. 그의 목적지를 이 책은 ‘세 번째 단계의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공천심사 과정에서 친노 후보군이 대거 탈락하는 와중에 공교롭게도 이 책은 대놓고 친노 계보도를 그려내고 친노의 역사를 살폈다. 당연히 그 속에서 안희정 지사는 ‘골수 친노 인사’로 분류된다. 하지만 충남지사로서 안희정은 과거의 잣대를 한참 뛰어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그가 그 물을 용수로 쓰자고 주장할 때, “가뭄 앞에 좌우를 따질 때가 아니다"라는 현실 감각을 읽을 수 있다.

전기에는 고향 논산에서 자라고 떠나 대전의 열혈 고등학생을 거쳐 운동권에 입문하여 혁명을 꿈꾸던 청년 시절이 화보와 함께 묘사된다. 그 과정을 따라가 보면 안희정을 내부로부터 지탱한 가치는 대부분 정의였다. 그 정의를 기반으로 고등학생 때 그는 좌충우돌 운동권이었고, 대학생 때 그는 ‘혁명의 전사’였다.

1994년 삼고초려한 이광재의 손에 이끌려 안희정은 운명처럼 노무현 의원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그는 정의와 함께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후일 그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노 대통령이 TV에 출연해 “안희정은 내 측근이자 동지”라고 말한 일은 민주주의에 대한 두 사람의 교감이 얼마나 깊은 수준에 닿고 있었는지 알게 한다.

안희정은 참여 정부 내내 공직에 나가지 않았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그는 스스로 죄인을 자처했고, 이듬해 ‘친노’ 딱지를 달고 충남도지사에 도전해 당선되었다. ‘정의의 혁명’과 ‘바보 노무현’을 거쳐 그의 내면에서 새로운 단계의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을 터였다.

탄핵 국면을 맞고 대권 선언을 하면서 그의 정치 철학도 조금씩 드러나는 중이다. 그것이 수신의 수준에 그치는 것인지, 치국의 수준으로 나아간 것인지 확인하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찌됐건 얼핏 고립주의로 비치기 쉬운 안희정의 스탠스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정권교체의 여정 또한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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