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개혁 이슈 선점에 나선 가운데 경제민주화, 그중에서도 재벌개혁이 그 중심에 서있다.

가장 적극적인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경제민주화 이슈를 적극 띄우겠다고 강조했다. 추미애 대표는 "그동안 경제정책이 재벌을 위한 것이라 국민이 소외됐고 국민이 국민으로 대접 못받았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팽개쳤지만 민주당은 대선 공약으로 (경제민주화 공약을) 하나씩 펼치겠다"고 말했다.

▲ 최성범 주필

보수 적통' 경쟁에 나선 개혁보수신당이 5일 발표한 정강정책 초안의 핵심도 재벌개혁에 방점을 찍고 있다. 깨끗한 보수, 따뜻한 보수의 기치 아래 “재벌 개혁을 통해 대기업과 중견 중소기업 간에 혁신적인 산업 생태계를 조성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며, 재벌의 골목 상권 진입이나 유통 지배를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차이가 새누리당과 차별의 시발점임을 규정했다.

여야 대선 주자들도 한결같이 재벌개혁을 골자로 한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이미 지난해 10월 발표한 경제공약에서 “재벌 개혁 법안들을 보다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성남시장도 재벌개혁 의지를 적극 피력하고 있다. 이 시장은 경제정책을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 표현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도 “재벌 대기업 위주의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 있는 중소기업도 대기업이 될 수 있는 길이 원천차단된다”며 “불공정한 경제구조와 관행을 척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공정거래위원회를 경제검찰 수준으로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고 강조했다.

또 개혁보수신당의 유승민 의원은 대기업 계열사간 출자제한 강화·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유 의원은 지난 19대 국회에서도 사회적기본법을 발의해 박근혜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 새누리당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난 바 있다.

민주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력한 재벌개혁 공약을 내놨다. 사문화된 재벌 계열분리명령제를 실질화하고 시장 지배력이 높은 기업을 대기업 집단에서 강제로 분리, 분할한다는 것이다.

여야 각 당이나 대선 주자 모두 재벌 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상황이다. 그동안 논의만 무성한 채 실질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으로 구체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나 마찬가지인 재벌 개혁이 이번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지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일단 국회에는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무더기로 상정돼 있다. 상법, 공정거래법, 법인세법, 상속세법, 유통산업법, 보험업법, 하도급법 개정안 등 경제민주화 관련 10여개 내외의 개정안이다. 2월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처리 여부가 결정된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순환출자를 3년 내에 해소하는 것을 골자로 한 최운열 민주당 의원의 입법안과, 지주회사 전환시 인적분할을 하는 경우 자사주 사전소각을 의무화하는 제윤경 민주당 의원의 입법안 등 기업 지배 구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안이 대거 상정돼 있다.

상법 개정안 역시 여러 법안이 상정돼 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집중투표제 의무화, 근로자를 대표하는 이사 선임, 자사주 관련 규제, 경영승계 규정 마련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삼성물산 합병 재발 방지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종걸 민주당 의원의 상법 개정안은 소액주주들이 합병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합병유지청구권’을 새로 도입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제안한 공익법인을 통한 경영권 승계를 막는다는 취지의 증여세 및 상속세법 개정안은 국회를 이미 통과했다.

▲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토론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뉴시스

이밖에 ‘기업분할 시 자사주 배정 금지’ 상법개정안(박용진 민주당 의원), ‘자사주에 배정된 분할신주 의결권 제한’ 상법 개정안(박용진 의원). ‘일감 몰아주기 지분율 제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등 편법 경영권 승계를 막기위한 법 개정안들이 대거 상정돼 있다.

새누리당도 야당의 움직임에 맞춰 재벌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상법 개정안’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야당이 재벌 개혁 법안으로 추진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 폐지, 일감 몰아주기 규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등에 대해서도 수용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의 홍수다.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선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최근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정경유착이 확인되면서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된 상태다.

그러나 재벌개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마음만 앞서서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논의만 무성한 채 방향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 명확치 않으면 재벌개혁이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재벌 주도의 성장 방식이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대다수가 공감할 터이지만 그 방향과 강도, 그리고 방법에 대해선 한 번도 공론의 장에서 국민적인 합의를 이끌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싫든 좋든 재벌 위주의 경제시스템이 한국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밉다고 다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새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해서 새 집 짓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살던 집을 먼저 부술 수는 없다.

재벌개혁은 당위적 과제이지만 기업 때리기(bashing)가 되어선 곤란하다. 재벌 3,4세의 갑질과 헐값 상속을 막는 게 과제이지 기업 활동 자체를 옥죄어선 안 된다.

어떤 경우엔 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법 집행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는 점에서 과도하게 많은 제도와 규정을 만드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섣불리 국민적 공분과 여당 리더십 공백의 와중에서 2월 임시국회에서 국민적 지지의 분위기 속에서 법안 처리를 서두를 경우 자칫 원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 지난해 7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016 재벌개혁 시민한마당 '을들의 합창'에서 참석자들의 야광봉을 들고 연좌시위를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대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 책임성 확보는 필수적이지만 기업들이 한꺼번에 수많은 법 개정안을 기업들이 다 감내하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작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자칫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헌재탄핵심판의 어수선한 와중에서 너무 많은 법안들을 제대로 논의하기엔 시간도 너무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재벌개혁의 논의의 장을 이제부터 마련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마음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대선 주자들이 재벌 개혁에 대한 공약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국민들이 논의할 수 있는 시간과 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엔 대선 주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재벌개혁이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선 차기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띤 분위기 속에 단행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늦어져 봐야 6개월이다.

대선 주자들이 이제부터 정교한 재벌 개혁 로드맵을 만들어 국민들의 심판을 받기를 기대한다. 재벌개혁의 방향과 일정, 그리고 수단은 어떤 것이 되든 그 선택은 국민들의 몫이다.

이와 함께 중요한 일은 기존의 재벌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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