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시사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89년 언저리쯤,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난 순간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쁜 것은 그 장면이 싱겁기 그지 없었다는 점이다.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 우연히 인사한 게 전부였으니. 그런 식의 언저리 스침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가령 역전에서 우연히 인사한 김에 식사를 함께 한 장면도 있다. 예정에 없이 술자리에 동참하기도 했고 유세 길에 눈인사를 건네기도 했지만 그 역시 우연한 조우들이었다.

봉하마을이 열리자 고향과 가까우니 눈 감고도 찾아갈 곳이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하다 부엉이 바위의 비극에 우연의 잔도(棧道)마저 끊기고 말았다.

그런 노 대통령이 2004년 초 탄핵을 맞았다. 그날 자칭 ‘노빠’라는 한 언론사 중진이 식사 자리에서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는데, 필자는 도무지 걱정이 되지 않아 머릿속으로 “당분간 책은 참 많이 읽으시겠는데 대체 몇 권을 해치울까” 하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상상에 빠져든 기억이 생생하다.

▲ 『칼의 노래』(소장판) = 김훈, 생각의 나무. 2007.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노 대통령이 당시 푹 빠져 든 책 가운데 하나가 『칼의 노래』라는 말을 들었다. 난중일기의 필적이 “수사를 배제한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 하던 작가. “살아 있는 것들은 기어이 스스로 아름다운 운명을 완성한다”는 말로 유명한 이 작가는 그와 같은 완성을 이순신에게서 보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작가가 어떤 이유로 초야에 묻힌 채 ‘이 사악한 세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모멸과 치욕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밥을 먹고 숨을 쉰다는 것은 이가 갈리는 일이지만 마침내 협잡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해 겨울 김훈은 자주 아팠는데 어느 날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찾았고 거기서 장군의 큰 칼을 내내 들여다보고는 저물어서 돌아왔다. 난중일기를 펼쳐 들어 읽고 또 읽던 중 장군의 혼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을 맞아 온 몸으로 바다를 지켜낸 장군이었지만 간신배의 모함에 만신창이가 되더니 어느 순간 절망의 끝자락까지 떠밀려갔음을 보았다.

“조정을 능멸한 죄,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죽음은 절벽처럼 확실했다. 다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문과 문초가 길지 않기를 바랐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안개 속의 살구꽃

탄핵은 노 대통령에게 덧씌워진 모함의 결정체였다. 그 모함은 이른바 젊은 검사들이 생방송 중에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조롱할 때 예고되었다. 가진 자들은 갖지 못한 자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자신들의 항구적인 기반에 대한 저 엄청난 위협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떤 식이든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탄핵으로 그는 끝이 나는 듯했다.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 달 만에 순천 권률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 칼의 울음

하지만 그들의 모함이 실로 억지에 불과했으므로, 그는 간단히 쓰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십 년 만에 비치기 시작한 한 줄기 서광이 허무하게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틈을 타 왜군 함선이 우리 수군을 전멸시키던 상황이 꼭 그러했다.

정유년 4월 백의종군하던 순신이 진주 초계 마을 아전 집 토방에 머물던 어느 날이다. 이미 함락해 남은 것이라곤 들풀밖에 없는 궁벽한 곳을 시찰 명목으로 도원수 권률이 찾아왔다. 도원수는 다급했다. 툇마루에 걸터앉기 바쁘게 이틀 전 칠천량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순신이 3년 반에 걸쳐 확보한 군비 전체, 조선 수군 총 군비의 팔할이 넘는 것이 하룻밤 하루 낮의 전투로 사라진 것이다. 도원수가 묻고 순신이 답했다.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방책은 물가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것입니다.”

“고맙네, 속히 시행하게.”

그것이 그가 듣고 싶다던 방책이었던가, 어쨌든 도원수는 순신의 복귀를 허여했다. 달리 어떤 방책도 있을 수 없음을 온 조정이 인정하고 있었음은, 후일 내려질 선조 임금의 교지가 말해줄 터였다. “그대는 힘쓸지어다. 그대가 나라 위해 몸을 잊고 나아감은 이미 다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길게 하리오…….” 순신은 종을 시켜 칼을 갈았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에 나는 종에게 칼을 들려서 진주를 떠났다. 내 늙은 종의 이름은 막쇠였다.”

- 다시 세상 속으로

국민들은 촛불을 들어 대통령의 탄핵에 항거했고 이어 선거에서 그를 위한 군대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 결과 탄핵은 파기되었다. 두 달의 칩거 동안 그는 자신의 운명이 자신만이 아닌, 어떤 접점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음을 절실하게 느꼈을 터였다.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독백’처럼.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무(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 칼과 달과 몸

퇴임 2년 되는 해 이른바 포괄적 뇌물 수수죄라는 덫에 걸려 우병우 당시 중수부 과장 등에게 심문을 받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기득권 세력들은 그의 존재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과거 노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보며 함박웃음 짓던 박 대통령이 거꾸로 탄핵을 맞아 칩거에 들어갔다. 전직 대통령을 앉혀 놓고 “당신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뇌물수수 혐의자일 뿐”이라던 우병우도 법의 심판대에 오를 전망이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다시 촛불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갈 무리들을 향한, 꿈속에서 또 다른 영화의 꿈을 꾸는 무리들을 향한.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시

※ 김선태 편집위원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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