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신간서평

[김선태=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내 기억에게 나는 쓸모없는 청중이다.

기억은 내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바라지만,

나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헛기침을 하고,

듣다가 안 듣다가,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간다.

때로는 기억이 들러붙어 있는 것에 진저리가 난다.

나는 결별을 제안한다. 지금부터 영원히.

그러면 기억은 애처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건 바로 나의 마지막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기억과 공존하기엔 힘겨운 삶」 중에서

뉴스를 보면 날마다 기억과의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듯한 요즘, 무심코 집어 든 시집에서 다시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여간해선 부정할 수 없는 기억의 본질에 관한 금언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깊고 맑은 기억의 노래

▲ 『충분하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문학과지성사.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 이야기다. 작가는 생전 ‘시단의 모차르트’라 불리며 폴란드 국민 작가로 추앙받았고 한국에서는 시집 『끝과 시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9년 86세의 고령으로 『여기』를 출간한 뒤 후속 시집 제목을 미리 『충분하다』로 정했지만 3년 뒤 미처 마무리를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2012년 4월에 출간된 이 시집은 시인의 유고집이 되었다. 한국어판에는 『여기』의 시들을 함께 싣고, 육필 원고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본들을 첨부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쉼보르스카의 시를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시어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시인들이 언제 어디서든 할 일이 많다는 의미”라며 자신의 관점을 설명했다. 마치 기억에 관해 그녀가 쓴 짧은 구절들이 시공을 넘어 오늘 여기 사는 독자에게 당연히 울림을 줄 것이라 확신하는 것처럼.

그 결과 시인에게는 사물, 역사, 문학, 문명, 그리고 인간의 실존 같은 철학적 주제들이 일상의 언어를 통하여 음악처럼 서로 넘나들며 녹아든다. 삶의 한 순간 어떤 종류의 지혜를 발견할 때, 자연 속 사물에서 본연의 가치를 발견할 때, 이성과 감성이 어느 한 지점에서 마주칠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맑은 시어를 쏟아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건져 올리는 그녀의 비범함에 세계의 평단이 경의를 표해 왔다.

시인이 지닌 시선의 힘은 매우 강하다. 그것은 종종 번득이는 통찰로 다가와 우리의 사유를 붙잡는다.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도 그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 「경우」는 돌풍으로 오직 한 장의 잎사귀만 달랑 남은 나무를 묘사하는데, 그 잎의 독무(獨舞)가 오래 갈 수 없음을 이런 식으로 예감한다.

이 경우

폭력이 가담을 한다,

당연하게도

폭력은 이따금 농담을 즐기니까.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이 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의문이 되기도 한다. 「강요」에서 인간의 한계를 토로하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고민해야 함을 보여준다.

가장 서정적인 시인들조차 그러하다.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자들도

끊임없이 씹고, 삼킨다,

한때는 성장을 지속했던 어떤 대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들과 화해할 수가 없다.

깊은 사유의 샘에서 지긋하게 압축해 길어 올리는 글이기에 난해함은 미덕일 수도 있다. 쉼보르스카의 많은 시들이 독자들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숙고하게 만든다. 물론 평범한 일상을 보통 사람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잡아낼 때도 있다. 이 시집에서 거의 유일한 ‘연시’라 할 수 있는 「공항에서」는 그와 같은 장면을 살짝 엉큼하고도 유쾌하게 그렸다. 그럴 때도 딱 필요한 단어만으로, 연인들의 침실을 훔쳐보기라도 할 듯 은근한 시선의 이동만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 팔을 벌린 채 서로를 향해 달려온다.

활짝 웃으며 소리친다. 드디어! 마침내!

둘 다 두꺼운 겨울 외투 차림,

두툼한 털모자에,

장갑,

그리고 부츠,

하지만 단지 우리의 육안으로만.

그들 자신은 이미 알몸이니까.

다른 시 「이혼」에서는 당사자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과 사물들 심지어 자동차와 시집들의 입장에서 이혼에 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누구나 한 번 생각해 보았음직한 많은 경우들을 나열하다, 살짝 맞춤법 교본을 빌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쓸 때 어떡하면 좋을지” 꼬집으며 이렇게 추가한다.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이름을 분리하기 위해 마침표를 사용해야 하는지.

자연의 조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작은 기쁨 하나를 놓치지 않는 시인의 감성은 넉넉한 포근함으로 우리 가슴에 오래 머문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 그게 자연의 귀결임을 인정하는 대목이 그렇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닥치게 될 낮이나 저녁’이며 ‘달력에서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고른 수많은 날짜 중 하나’이고, ‘자연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전능함’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삶은 얼마나 허무할까?

그러나 아주 이따금

자연이 작은 호의를 베풀 때도 있으니

세상을 떠난 가까운 이들이

우리의 꿈속에 찾아오는 것.

사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기억의 되새김을 통해, 쉼보르스카는 독자들에게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펼쳐줄 수 있음을 기쁘게 여겼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남긴 육성의 기록

▲ 『금요일엔 돌아오렴(오디오북)』 =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

단원고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보려는 것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 닿을 수 없는 수백 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그해 12월까지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했고, 그중 부모 열세 명을 인터뷰하여 책으로 펴낸 데 이어 육성이 담긴 오디오북을 내놓았다.

작가들이 부모들 곁에 머물렀던 240일 동안, 온 마을이 상가였다. 안산은 250명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침묵의 도시였다. 작가들의 가슴에도 통증이 계속 몰려왔다. 아이들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을 때는 단순 기록조차 할 수 없었다.

부모들은 사진 속 아이들을 보여주며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울음을 울었다. 그 속에서 작가들은 부모들이 자식을 잃은 뒤 그 순간순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떨리는 순간까지 기록하려 했다. 여기에는 세상이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삶의 진실이 담겨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세상은 바뀌었고 그로 인해 부모들은 아파했다. 시민들의 마음이 어떻게 절대적인 호의에서 절대적인 반감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지, 부모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세상이 참으로 교활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밑바닥의 숨겨진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세상으로부터 그처럼 기이한 고통을 받는 동안에도 부모들은 전에 없던 길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자신들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친 것도 사람이지만 자신들을 다시 일으키는 것도 사람임을 알기에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침묵하는 것은 자신들을 벌하는 일임을 알기에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자식들을 잃은 끝에 얻은 깨달음이고 성찰이었다.

인터뷰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유가족들이 그동안 어떻게 잘 견디고 잘 싸워왔는지 무겁고도 담담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비록 단편적이지만 두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다.

“건우 어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공황장애를 겪고 있어서 집 밖에 잘 나가지 못한다. 작가는 그런 그녀를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직전인 8월 6일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천주교 신자인 그가 혹시라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의 단초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용기에 용기를 낸 걸음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작가에게 핸드폰 속 건우 사진을 보여 주며 그녀는 아들 이야기를 술술 실타래 풀듯 풀어놓았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아이, 공부하라고도 하지 않고, 통제하거나 뭘 강요하지도 않았던 아이. 그래서 건우는 자기 하고 싶은 것은 늘 부모에게 지체 없이 솔직히 말하는 맑고 밝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사고 당일 이상하게 집으로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아니라 생각하면서 상심하던 어느 날, 다른 아이 엄마가 건우 동영상이 올라 왔다고, 같이 보자고 말했다. 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혼자 인터넷을 뒤져 건우를 찾아냈다. 영상에는 물에 잠기기 직전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찾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건우는 그 속에서 다른 아이들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있었다. 그러고 있느라고 전화도 문자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세월호 참사로 한날한시에 같이 사라진 김건우가 세 명이나 되었다.”

-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 씨

“지성이 아버지는 딸에게 미안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마른 그의 몸은 더 반쪽으로 메말라 위태로워 보였고 햇볕에 그을린 그의 얼굴은 더 검게 탔다. 그가 울자 작가의 가슴에도 통증이 밀려 왔다. 사고 이후 아무 말도 못하고 유가족 곁에 머물러 있던 작가에게 오히려 자신이 도울 일이 뭐 있냐고 묻던 이였다.

사고 당일 오전 9시 4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고 했다. 받지 않으려다 받았더니 지성이었다. 같은 반 친구 전화기였다. 지성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배가 기울었어.” 그는 차분하게 일러주었다. 구명조끼부터 챙기라고. 마음이 급해져 성질을 냈다. 비상구도 문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빠 거기는 갈 수가 없어.” 이미 배가 기울어 아이들이 올라갈 수 없는 곳에 문이 있었던 것이다. 전화가 끊어지고 YTN 뉴스에 ‘인천에서 출항한 배’ 이야기가 나왔지만 지상파에서는 아무 소식도 나오지 않았다. 무작정 진도로 달려갔다. 생존자 명단에 아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아이는 없었다. 뒤이어 대통령이 진도를 방문해 많은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성이 아빠가 부탁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한 약속, ‘구조대가 배 위에서 작업하는 장면’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 2학년 1반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 씨

덧붙여 쉼보르스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억에 떠올려 쓴 시 하나를 옮긴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인간은 그것과 공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 서로는 함께 해야 함을, 담담하게 일깨워준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 그녀가 말한다.

목요일에 비행기가 폭발했다는 소식 들었어?

바로 그 사건 때문에

그들이 날 데리러 왔었어.

아마도 탑승자 명단에 그이의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야.

근데 그게 뭐 어때서?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잖아.

혹시 내가 놀라서 쓰러질까 봐 그들이 약을 주었어.

그러고 나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을 내게 보여주었어.

한쪽 팔만 빼고는 온통 새까맣게 그을린 누군가를.

찢어진 셔츠 조각, 손목시계, 그리고 결혼반지.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어, 왜냐하면 절대 그 사람일 리가 없으니까.

그가 그런 몰골을 하고서 내게 이런 짓을 할 리가 만무하니까.

상점에 가면 널린 게 바로 그런 셔츠인걸.

그 시계는 그저 평범한, 낡은 시계일 뿐이고.

그의 반지에 새겨져 있는 우리의 이름은

그저 흔한 이름에 불과하잖아.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 여기 내 옆에 좀 앉아봐.

그 사람은 목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어.

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에겐 아직 수많은 목요일이 남아 있는걸.

차(茶)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끓일 거야.

그러고는 머리를 감을 거야,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이 모든 일들로부터 깨어나려 애써볼 거야.

네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왜냐하면 거긴 너무 추웠거든,

근데 그이는 고무로 만든 얇은 침낭 속에 누워 있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운이 아주 나빴던 그 남자 말이야.

나는 목요일을 끓일 거야, 그리고 차(茶)를 감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의 이름은 너무나도 흔해빠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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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태 편집위원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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