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시사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2014년 4월 16일 이후 숱한 날들이 지났지만 담담한 어조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참사 순간과 이후의 충격적인 장면들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고, 망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 한이 너무 크고 깊어 감히 운을 떼기 어려우며, 남겨진 의문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데 해결할 길은 막막하여 무력함과 분노를 달래기 힘든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정일 테다.

그런 가운데 참사 969일째 되는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다. 대통령 탄핵은 직접적으로는 최순실 무리와 결탁해 저지른 국정농단의 심판이라는 성격을 지니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 폐단이 지극히 반인륜적인 방식으로 귀결된 경우다. 이 시점에서 그날 무엇이 왜 문제였는지 잠시 상기해 보자.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침몰한 배

2014년 4월 15일 저녁 9시, 짙은 안개 속에서 출항 시간을 2시간 반이나 지체한 선령 21년의 세월호가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났다. 이 배는 21년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규정보다 세 배나 되는 짐을 실은 채, 수학여행의 꿈에 부푼 안산 단원고 학생 324명을 포함한 476명 내외의 승객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했다.

4월 16일 이른 아침, 물살이 최대 시속 11킬로미터라는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에서 느닷없이 항로 변경을 거듭하던 세월호는 팽목항 앞바다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았다. 단원고 2학년 최덕하(사망) 군은 아침 8시 52분 전남소방본부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신고함으로써 불행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3분 뒤 세월호 선원이 코앞에 있는 진도를 놔두고 제주교통통제센터에 조난 신호를 보냈다. 이 때 당연히 써야 할 공용채널을 쓰지 않아 주변 선박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사라졌다.

9시 5분 선실로 물이 차오르자 놀란 승객들이 너도나도 배에서 뛰어내렸는데 배는 곧 거꾸로 서기 시작했다. 비극을 감지한 단원고 연극부원이 카카오톡 단체방에 차분하게 문자를 남겼다. “우리 진짜 죽을 것 같다, 사랑한다, 살아서 만나자.” 17분, 세월호 선원은 진도관제센터에 배가 50도 이상 기울어졌다고 보고하였다.

9시 30분경 첫 구조선인 목포해경 경비정 123함이 세월호에 도착했는데, 해경들이 기울어지는 배를 보면서도 선장과 선원들을 구조하느라 선내 진입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이 선원들은 배에서 탈출하는 순간까지 “제 자리에 가만있으라”는 선내 방송 멘트를 반복해서 내보냈는데, 해경도 승객들에게 아무런 방송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일찍 선실 내에서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면 탑승객 거의 전원이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10시 17분 배는 90도로 기울었고,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가 발신되고 있었다. "배가 기울고 있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오전 11시 18분, 뾰족한 뱃머리만 남긴 채 세월호는 바다 속에 잠겼다. 그 직전인 오전 10시 정부는 대책본부를 구성했고, 여객선 조난 소식에 놀랐던 국민들은 대부분의 방송사가 내보낸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 보도에 안심했다. 실상은 이날 오전 스스로 배를 탈출했거나 선체 밖에 있다 구조된 172명이 세월호에서 살아나온 탑승객 전부였다.

17일 오후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해 실종자 가족들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지키겠다고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 약속의 핵심은 구조였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이날부터 다음날 낮까지 구조는커녕 수중 수색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19일 밤이 되어서야 선실 수색이 진행되어 사망자 수는 50명으로 불었다.

다음날 가족들은 청와대 행진을 시도하다 진도대교에서 막혔고 이틀 뒤 사망자 수는 100명을 넘어섰다. 구조 책임을 진 해경은 기이한 행보를 계속했다. 제대로 된 장비도 구조 경험도 없는 해경이 국내 최강의 해저 수색 능력을 지닌 해군의 지원을 거부하더니,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국 함대의 지원 요청도 거절했고, 대체구조를 명목으로 끌어들인 민간 업체 언딘은 인명구조와는 거리가 먼 사실상의 방관자였다. 29일 사망자 수가 200명을 넘어서자 다시 대통령이 다녀갔고 결국 사망자는 304명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 『4·16 세월호 참사 백서』(대한변호사협회, 2015. 4. 16.)와 최순실, 박근혜 대통령

5월 16일 청와대에서 가족을 만난 대통령은 가족들이 요구한 ‘특별법 및 특검’을 약속하고 사흘 뒤 구조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경 해체’를 발표하는데 실은 그 조직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7월 7일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열렸는데 최초 오보를 낸 MBC는 ‘언론 자유 수호’를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그 사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전 회장 유병언이 기이하게도 도주 며칠 만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백골로 발견되었다. 11월 7일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어 특조위가 출범되었지만 요령부득의 난항을 겪다 조사 기간을 넘기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에 숨겨진 내막이 있었는가

그간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숨겨진 내막이 있는지에 관해서 제기된 의문은 그 수를 세기 어렵다(민변, 2014. 7. 21. 자료). 공식 자료 및 언론 보도와 사고 가족들의 발언 등을 따져 사건 규명을 가로막는 강력한 의문들을 살피면 이렇다.

첫째, 세월호 침몰 사고의 발생 시각은? 세월호 침몰 사고는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급변침으로 인해 배가 기울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공식 기록이다. 하지만 4월 16일 단원고 교무실 칠판에는 ‘8시 10분’에 ‘제주 해경, 배와 연락 안 됨, 학교로 전화 연락’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또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당일 7시 46분 오하마나호 선장에게 전화했고 8시 26분 청해진해운의 물류팀 과장에게 전화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합동수사본부는 통화기록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둘째, 123정은 왜 선원들만 구조해 보호했나? 세월호 사고 당시 가장 먼저 도착한 국가 장비는 목포 해경 소속의 123정이다. 123정은 9시 35분경 세월호에 도착하여 먼저 고속단정을 보내 좌현 중앙부 갑판으로 가서 기관부 선원을 구조했고, 이어 선수 방향 조타실로 가서 선장과 선원들을 구조한 다음, 말 그대로 줄행랑쳐 가버렸다. 이후 놀랍게도 해경은 구조된 선장과 선원들을 외부로부터 격리하여 ‘특별히 국가기관 보호 하에’ 두어 구속 조치 전에 ‘입을 맞추게’ 했다.

셋째, 세월호에 또 다른 주인이 있는가. 지난 2015년 2월 16일 ‘416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분과’는 세월호 수사와 인양을 호소하는 ‘가족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10개 항목에 걸쳐 주요 의문점을 열거했는데, 그중 ‘세월호의 주인은 누구인가?’로 시작되는 3항이 단연 주목된다. 여기서는 ‘세월호 선원의 노트북에서 나온 국정원 지적사항’ 파일에 무려 100여 가지 지적사항이 열거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국정원이 세월호에 깊이 개입했다는 의미다.

특별히 우리 군경이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무능함은 그 정도가 지나친 탓에,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케 할 정도다. 이에 관해 세 가지 의혹만 보자.

첫째, 해경은 왜 우리 군을 통제하여 초동 대응을 무산시켰는가. 사고 당일 오전 해군은 해난구조대(SSU)를 현장에 급파해 하잠색을 설치하는 등 구조활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구조 작전을 총괄지휘한 해경은 이들의 투입을 사실상 막았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자신들이 돈을 주고 계약한 언딘이라는 민간업체의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같은 논리로 해경은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민간 잠수사들의 투입을 막았고, 이후 언딘의 무력함이 드러나서야 이들을 통제 하에 투입했다.

둘째, 우리 군은 미 해군의 지원을 왜 거절하였나? 당일 사고 지점 북서쪽 155킬로미터 해상에서 훈련중이던 미 해군 상륙강습용 항공모함 본험 리처드호가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긴급히 배의 방향을 돌렸다. 동시에 한국의 미 해군 대변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원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렇지만 모종의 상황 전개 후 미 함대는 지원을 포기했다. 미군은 해군 공식 뉴스를 통해 지원 의사를 거듭 밝혔지만 무시되었다(미 해군 2014. 4. 17. ‘Bonhomme Richard Assists in Korean Search and Rescue Efforts’).

셋째, 통영함 출항을 막은 자는 누구인가. 세월호 참사 당일 최신식 구조함인 통영함에 구조를 위한 긴급투입 지시가 내려졌다. 통영함은 수중 3천미터까지 탐색하는 무인탐사기와 음파탐지기를 탑재했고, 잠수요원이 수심 90미터까지 내려가 구조 임무를 수행하며, 최대 8명이 들어가는 챔버를 싣고 있었다. 이 배의 운영권이 복잡한 탓에 관계자들이 합의각서를 썼고 해군참모총장이 두 차례나 공문으로 명령을 내렸지만 통영함은 끝내 출동하지 않았다.

 

▲ 세월호 참사 보고를 받은 지 7시간 만인 오후 5시 15분 중앙재난안전본부에 나타나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박근혜 대통령. 다소 헝클어지고 부스스해 보이는, 하다 만 듯한 올림머리가 실은 연출임이 밝혀졌다. 머리와 눈이 무언가에 눌린 흔적은 채 지우지 못했다.

그날 오후 대통령의 관심은 ‘헤어스타일’

참사를 막지 못한 데 따른 궁극적인 의문은 “대체 누가 재난을 지휘했나?”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 ‘대통령 훈령 318호’ 등은 “국가적 재난시 대통령과 국가안보실이 최상위 기관”임을 명시하고 있다. 당일 청와대는 뒷전에서나마 실질적으로 정부를 지휘하여, 해경에 수시로 지시했고,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VIP(대통령)의 뜻을 강조했다. 이 때 대통령이 말 그대로 사라졌다. 구조를 위한 골든타임에, 비서실장 김기춘을 포함하여 청와대 그 누구도 최소 7시간 동안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대통령의 ‘연락 두절’로 재난 지휘부가 머리 없는 손발 신세가 되어 우왕좌왕하는 사이 희망은 멀어져 갔다.

막상 탄핵 투표를 눈앞에 둔 지금 ‘7시간 미스터리’ 중 마무리 시점에 해당하는 일부 일정이 밝혀졌다. 대통령이 그날 오전의 사생활을 가슴에 간직한 채 올림머리와 풀린 머리 가운데 어떤 지점이 ‘쇼타임’에 어울릴 지 고민하며 미용사를 불러들였고, 그렇게 해서 처연함과 우아함이 절묘하게 조합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는. 세월호가 뒤집혀 뱃머리만 남은, 부모형제들은 숨이 넘어가고 국민들은 티비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던, 그 시점 이야기다. 소학에 “겉이 화려할수록 속은 병든다”고 했던가.

이 기괴하고도 도발적인 사실이 다행스럽게도 최순실과 대통령, 세월호 참사를 견고하게 이어준다. 국민들은 자칫 잊을 뻔했던 참사의 순간을 떠올리며 비극의 원천을 알게 되었다. 이 정부를 일찌감치 한줌 그림자 무리들이 장악한 채 국민들의 요구에 일관되게 “가만 있으라” 겁박해 왔음을, 그 관성이 세월호에 그대로 이어져 확성기로 터져나갔음을, 새삼 상기하기 시작했다.

주권과 권력을 행사해야 할 국민이라면 세월호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게 부족하여 감히 막지는 못했으나 잊지 않고자, 변치 않고자, 다시 맞서고자 지난 몇 차례의 궐기에 백만, 이백만, 수백만이 참여했다. 권력을 사유화한 무리들이 정의와 합리와 문명의 탈을 쓴 채 자행해 온 불의와 왜곡과 야만에 분노했고, 그럼에도 진실과 용기와 도전은 사라질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위안 삼으려 했다.

그동안 거리의 시민들은 성역을 허무는 집념과 끈기에 헌신하려 했고, 약자도 패자도 물러서지 않는 민초의 저력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하여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로 타올라 비명에 간 넋들을 위로하고 망축할 기회까지 소망하게 되었다. 그런 시민들이 이제 잠시 담담하게 탄핵을 지켜볼 참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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