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 물을 쳐서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넘어가게 할 수도 있고, 부딪쳐 흘러가게 하면 산에 닿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맹자 고자 장구 상편 2에 나오는 이 말은 성선설을 대표하는 구절로 널리 인용된다. 맹자는 이 말을 보충하여 물이 원래 아래로 흐르나 주어진 기세로 인해 위로 튀는 것이니,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환경에 따라 불선을 행하게 된다고 했다. 여기에 단서를 달아 소인은 타고난 본성을 버리는 이를 소인으로, 이 본성을 보존하는 이를 군자로 구분하면서 또한 군자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덧붙였다(이루 장구 하편 19, 12).

5개월 된 아기 ‘선악’ 판단 능력 갖춰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선악설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에게 “도덕성은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낯설지 않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 이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맹자의 입장에서 사단칠정론을 제기, 200년에 걸친 이기 논쟁에 단초를 제기하기도 했다. 서양 철학과 심리학의 전통은 이와 사뭇 다른 면이 있다. 존 로크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백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보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영아를 문명인으로 바꾸는 데는 부모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믿었다.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폴 블룸은 발달 심리학과 진화 심리학의 기제를 사용하여 서양 주류 학계에 반기를 든다. 직접 수행한 연구에서 그는, 아기가 말을 하거나 걷기 전부터 다른 사람의 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공감과 동정심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달래는 등 기초적인 선악 판단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블룸의 연구 팀은 6개월에서 10개월 된 아기 앞에서 인형(정확히는 인형처럼 조작되는 기하학적 물체)이 언덕을 오를 때 도움을 받거나 방해받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 다음 실험자는 도와준 물체와 방해한 물체를 쟁반에 놓고 아기가 어느 쪽으로 손을 뻗는지 관찰했다. 아기들은 방해한 물건보다 도움을 준 물건들에게 압도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을 뻗지 못하는 3개월 된 아기들에게는 비슷한 실험을 통해 시선을 돌리는 쪽을 관찰했는데 역시 선한 쪽을 보는 시선이 압도적이었다.

▲ 『선악의 진화 심리학』폴 블룸 저․ 인벤션. 316쪽.

그와 달리 좀 더 진전된 실험은 ‘심술’을 다루는데, 5개월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아기들은 ‘처벌이 정의롭다고 판단되면 처벌하는 경우’를 선호하기 시작한다. 8개월이 되면 아예 ‘못된 아이에게 심술궂게 행동하는 경우’를 대놓고 선호한다. 아기들의 도덕성이 선천적임과 동시에 ‘진화’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블룸은 이처럼 ‘진화 심리학적 입장’에서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도덕성의 한계를 파헤친다.

진화 과정이 방치되면 도덕성은 자칫 비극으로 내닫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을 적대시하거나, 지역주의에 빠지거나, 인종주의적 편향을 보이는 경우다. 연구자가 아이에게 백인 소년과 흑인 소년의 그림을 보여준 다음, “이 가운데 한 명은 고양이가 호수에 빠진 걸 보기만 한 ‘나쁜’ 아이고, 한 명은 고양이를 건져 준 ‘착한’ 아이”라고 설명한 뒤 누가 착한 아이인지 물었다. 백인 아이가 백인을 선택하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관찰 결과 놀랍게도 흑인 아이 역시 백인 아이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판결문에 인용되기까지 한 이 연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달 심리학적 발견의 하나라 불리게 되었다.

나치, 실험 통해 ‘유대인=짐승’ 편견 심어

후일의 정교한 실험 결과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향은 겨우 6세 때 확립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10대 때 아이 3명을 강간하고 살해한 피터 우드콕은 정신 병동에서 수십 년을 지내며 ‘치료’ 받은 뒤, 감독자 없이 3시간 산책할 허가를 얻었다. 그 사이에 우드콕은 다른 환자를 유인해 손도끼로 살해했다. 심지어 살해 동기에 대해 우드콕은 “사람을 죽일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 대답했다. 이미 이전에 세 명이나 죽인 일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말한다. 살인의 느낌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수십 년 뒤 다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분명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만 동정심이 아닌 즐거움으로 느끼는 이런 심리를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 한다. 이 또한 선천적 본성 중 일부일까?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비이성적 방식으로 선한 인간을 얼마든지 악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한다. ‘역겨움을 유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나치 친위대들이 기차에 탄 유대인들을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꼭 그런 짓을 저질렀다. 유대인들이 어디서나 쭈그려 앉아 배변을 보려 하자, 이를 본 독일 승객들은 유대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블룸은 수많은 실험과 논증을 통해 아기, 즉 인간이 원천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진화를 통해 공감과 동정심, 정의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를 갖추어 왔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정의로운 아기’를 방치할 경우 초래할 비극 역시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비극에 빠지지 않으려면 아이의 발달 과정에서 잠재된 ‘이성적 진화’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수없이 방치되고 왜곡되며 유혹에 빠진다. 그렇다면 대체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주장하고서도 다음과 같이 혹독한 말을 남긴 맹자의 심정을 이로써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려 맡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심지를 괴롭게 하며, 그 사람의 근골을 괴롭게 하며, 그 사람의 몸을 굶주리게 하며, 그 사람의 몸통을 텅 비게 하여, 행동하는 데 그 사람의 하는 짓을 어지럽게 만드니, 이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그 사람의 정신을 견인하게 하여 그 사람의 힘에 겨운 능력을 보태어 주는 것이다.”(고자 장구 하편 15)

※ 김선태 주간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