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고약’(膏藥)은 냄새나 생긴 모습으로 보아 모두 우리나라 전통 약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명래고약’도 유명한 한의사가 만든 고약이라 생각했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공세리성당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 주말 가톨릭 ‘원머리성지’를 가던 중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로 유명한 공세리성당에 들렀다. 입구 안내판에는 1895년 부임했던 프랑스인 에밀 드뷔즈 신부(Devise, 成一論·성일론)가 고약을 만들어 사목회장이었던 이명래(가톨릭명 요한)에게 전수한 약이었다고 적혀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프랑스외방선교회 소속인 드뷔즈 신부가 공세리에 성당을 지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배운 방법으로 이명래와 함께 야생초와 갯벌 등에서 원료를 추출해 고약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한다.

아산만이 삽교천 아산천과 만나는 이 지역은 조선시대 조세인 쌀을 조운선으로 실어가기 위한 창고지다. 아산만이 서해바다로 나가는 당진(唐津)이 당나라와 교류거점임을 나타내듯이 삽교호의 한진(漢津), 당진군 고대면의 당진포리 등 중국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일전쟁도 여기서 시작됐다. 일본 해군이 1894년 7월 25일 동학농민전쟁 발발 후 이곳에 와있던 청나라의 이홍장이 이끌던 북양함대를 기습해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은 육지로 옮아가 가까운 성환, 조치원 등에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소설이라는 이인직의 ‘혈의누’ 첫머리에 나오는 평양 시가전에서 일본군이 이겨 전쟁이 끝났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평택을 지나 국도를 타고 아산만 방조제를 건너 충남의 당진 쪽으로 들어서니 해안 야산위에 공세리성당이 보였다. 여기서 삽교호 방조제를 넘어 당진 기지시(機池市)가 보인다.

‘공세리(貢稅里)’를 검색하면 전국에 3곳이 나온다. 이곳 아산 인주면 공세리와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그리고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등이다.

아산 공세리는 충청도 서남부 ‘예당평야(禮山, 唐津)’에서 나오는 세곡미를 보관하던 공세창고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경부고속 부산 쪽 기흥휴게소 맞은편 길은 공세로이다.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의 공세리 5층석탑이 남아있다. 이곳이 예부터 왕실미로 쓰이던 여주·이천 평야의 쌀을 모아 두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에도 공세리가 있다. 용문 양평 쪽에서 남한강으로 들어가는 흑천 남쪽 평야지대에 있는 농촌마을이다. 나라에 바치는 세곡미를 모아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실어가던 창고가 있던 곳이어서 공세울로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불곡리 일부를 합쳐 공세리가 되었다. 문막 여주 이천 등지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이어서 근처 신내리에 ‘신내양평해장국’이 유명하다.

경기도 평택을 지나 아산호와 삽교호를 넘어 아산, 당진, 태안, 서산, 홍성 지역을 예부터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이라 부른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아산만, 육지였다가 조운을 위해 땅을 파내 뱃길을 만들어 섬이 된 안면도를 끼고 있는 천수만, 태안 당진 사이의 가로림만 등 내륙 포구가 발달해 ‘내포’라 불렸다.

이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60여 년간 천주교 박해시대에 천주교가 일찍 전해졌다. 들키면 바다로 도망가기가 쉬워서였단다.

▲ 공세리성당/'순교자의 땅, 믿음의 못자리'(김철호 작)=뉴시스

공세리 일대는 일찍 ‘내포의 사도(司徒)’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이 복음을 전해 모두 32명이 순교했다.

박해기에도 동네 70%가 천주교 신자였던 이 지역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인 1895년 6월 공세리성당이 생겼다.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드뷔즈 신부가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사서 성당으로 꾸몄다.

1897년 6월에 3대 주임으로 다시와 조선시대 성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300여년간 공세창고가 있었던 언덕 일대 1만평을 매입했다.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이때 이 지역 천주교 신자가 벌써 1,800명을 넘었다.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1920년대 신자수가 증가하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리고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성당 마당에 공세, 매산리 등에서 1866~68년 3년간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수원감영에 끌려가 참수당한 박선진과 사촌형 박태진을 비롯한 순교자 현양비가 있다. 성당 주위에 3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팽나무, 피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성당 입구에 ‘충남도 역사유적지(공세곶 창고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 성당도 서울의 명동, 중림동의 약현성당과 강원도 횡성군 입구의 풍수원성당에 이어 프랑스 신부들이 지었기 때문에 유럽식 고딕성당의 맥을 잇는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예뻐 사진작가나 화가들이 많이 다녀간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수녀 아가다‘ 등과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 등 드라마, CF 등 70여편을 찍었다 한다.

▲ ‘원머리성지’ 박선진, 박태진 순교자의 묘

언덕을 내려와 부근에 바다를 메워 ‘원(언)머리’라는 마을에 박선진, 박태진 순교자의 무덤인 ‘원머리성지’가 있다. 새원마을은 공세지 북쪽 들 가운데 있는데 새로 둑(堰·언)을 막아 생겼다. 금강, 낙동강 하구언이라 할 때의 둑을 말한다. 이 입구를 원머리라 불렀다한다.

공세리성당 밑서 내려다본 들이 넓었다. 예전에는 바닷가 갯벌에 염전도 있었지만 빨리 돈이 되는 소금을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2평 정도의 큰 솥을 걸고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었다 한다.

이 평화로운 바닷가에 갯내음만이 아니라 피냄새가 느껴진다. 멀리는 당나라 침략군과 백제군의 싸움터였고 임진왜란때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충무공 이순신의 가족을 죽이려 아산을 휩쓸고 내려갈 때 3남 이면(李葂)을 죽인 곳이다.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시대 끝 무렵인 병인박해 3년간 30여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청일전쟁의 시발지였고 6.25때는 인민군이 양민을 많이 학살한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과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건 힘없는 순진무구한 백성들이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