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한 나라의 운명이 장기간에 걸쳐 위협받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조타수를 자처하며 일어서지만 종종 개인의 역할이 난국 타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때로 그가 보여준 이런 저런 흠결과 한계로 인해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공적이 심히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헌신적 역할과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몰락의 위기를 딛고 재기한 나라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만난다. 전설의 시대에 그저 그런 부족의 하나였던 로마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푸리우스 카밀루스, 정체절명의 순간에 예루살렘 정확하게는 그 주민들을 온전히 대피시킨 이벨린의 발리앙 같은 인물이 그렇다.

▲ ▲ 『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 플루타르코스, 휴먼앤북스.

과오와 시기 속에도 로마를 위해 평생 전장을 누빈 카밀루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446 – 365 BC)는 로마 건국 초기의 위대한 전사다. 로마의 건국이 주로 로물루스의 신화적 행적에 힘입은 것이라면, 그 로마가 반석에 올라선 것은 주로 카밀루스의 인간적 성취에 힘입은 것이다. 카밀루스는 평생에 걸쳐 주변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로마를 지켜냈으며, 그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 로마는 인근에 적수가 없는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그는 한 번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카밀루스는 고대 전장을 휩쓸었던 로마군단의 원형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는 로마군의 중핵인 중장보병대를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3개 대열로 나누어 배치했고 이를 운용하며 가는 곳마다 상대방을 쓰러뜨렸다. 후일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의 전상 군단을 괴멸시키고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낼 때도 이 대형은 어김 없이 등장했다.

무기를 수저처럼 들고 전장을 침상처럼 누볐던 그의 일생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푸리우스가 성장할 당시 로마는 권력을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던 공화정 체제하에 있었다. 평범한 귀족 출신이었던 카밀루스는 인근 부족과의 전투에서 거듭 공을 세운 덕에 자력으로 승진을 계속하여 감찰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0년에 걸쳐 이어진 경쟁 도시국가 베이이와의 전쟁 덕이었다. 당시 베이이는 로마와 세력이 엇비슷해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 로마는 장수를 계속 바꾸었고, 전쟁 개시 7년쯤 지나 카밀루스가 지휘권을 넘겨받게 되었다.

▲ 승전 행진을 벌이는 푸리우스 카밀루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Francesco Salviati) 작, 프레스코화.

카밀루스는 전임자들처럼 직접 공격하는 전략 대신 주로 주변 도시들을 먼저 정복한 뒤 포위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리하여 베이이를 고립시킨 다음 몰래 땅굴을 파고 들어가 일거에 점령하여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무례와 사치에 빠진 카밀루스의 인간적 한계가 드러났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의 프레스코화에 영감을 제공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글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탓이었는지, 아니면 수많은 축하 인사가 쏟아진 탓인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우쭐해진 카밀루스는 매우 웅장한 승전 행진으로 자신의 업적을 자축했다. 그는 무려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몰고 로마를 돌았는데 그때까지 그 어떤 군 지휘관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카밀루스는 충분한 자격이 있었음에도 여섯 명의 호민관 중 하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로마는 북쪽 도시 국가 팔레리이와 전쟁을 벌여야 했고, 카밀루스는 군대를 끌고 나아가 승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항복한 팔레리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로마는 전리품 착복 혐의로 그를 재판에 넘겼고 친구들마저 외면하는 것을 본 카밀루스는 홀로 유랑길에 올랐다. 카밀루스가 떠난 로마에는 영웅이 사라진 고대 도시가 대개 그러하듯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갈리아인들의 침공은 로마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로마 건국 360년경 갈리아는 파죽지세로 몰고 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내친 김에 남하를 계속하다 마침 카밀루스가 은둔하고 있던 아르데아에 접근했다. 적의 동태를 살펴본 카밀루스는 아르데아 젊은이들을 모아 성안에 결집시킨 뒤, 한밤중에 갈리아 진영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승리에 도취되어 먹고 마시느라 단잠에 빠진 갈리아인들을 철저히 도륙해버렸다. 이 일로 카밀루스는 다시 독재관이 되어 로마에 복귀한 뒤 거의 자신의 명성으로 갈리아인들을 로마에서 몰아냈고, 더 나아가 주변 부족에 점령된 도시들을 모두 되찾아왔다.

세월이 흘러 노쇠해진 카밀루스는 관직을 버리고 쉬어야 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주변 부족의 위협이 커지면 어김없이 그를 불러냈고 그때마다 카밀루스는 부름에 응해 해결사가 되었다. 그는 전임 사령관의 오판으로 전멸할 뻔한 군대를 살려내기도 했고, 반란을 준비하던 부족이 카밀루스가 나섰다는 말에 즉시 달려와 용서를 빌기도 했다. 무려 여든 살 무렵에 투구, 방패, 투창 등 병사들의 무기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진법을 개량하여 쇄도하는 갈리아군을 섬멸했다. 이윽고 카밀루스는 평민 집정관 제도를 도입하여 귀족과 평민들의 갈등을 조정, 로마 내부에 공고한 평화를 가져다 주고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보잘 없는 가문에 태어나 평생 로마에 충성을 바치며 전장을 누볐다. 이전까지 채 여물지 못했던 로마는 카밀루스의 시대를 거치며 인근 부족들을 완벽하게 제압해 지중해의 지배자가 되었고, 로마인들은 그에게 ‘제2의 창건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맨 손으로 나서 예루살렘을 구한 이벨린의 발리앙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 3대 종교에서 모두 떠받드는, 역사상 ‘신의 도시’라는 이름에 가장 부합되는 곳이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한 뒤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의 성지가 되었고, 아브라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무함마드가 이곳을 향해 경배했고 이후 알 아크사 모스크가 세워지면서 이슬람 3대 성지의 하나가 되었다.

기원 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파괴를 겪어야 했던 예루살렘의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다.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당시 이슬람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지나친 약탈과 살인 행각을 벌여 이슬람권의 공분을 샀다. 이어 제2차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 왕국은 원정군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전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 동안 분열 상태에 놓였던 이슬람 권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쿠르드족 장군이던 살라흐 앗 딘, 줄여 살라딘이 1174년 먼저 이집트를 장악하더니 여세를 몰아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워 대제국의 술탄이 된 것이다.

기독교 세력이 주춤한 사이 살라딘은 성전을 선포하고, 한때 침공했다 퇴각했던 예루살렘으로 재차 쳐들어갔다. 1187년 7월 4일 유명한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을 대파한 살라딘은 그 해 9월 20일 예루살렘 성벽 앞에 도착한다. 살라딘은 항복을 제의했지만 예루살렘 총주교 헤라클리우스가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충돌은 불가피하게 보였다. 그런데 총주교의 호언과는 달리 실제 예루살렘 내에 병사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 도시의 함락은 불 보듯 뻔했다. 살라딘의 명령 아래 술탄군은 공성전을 펼쳤고 29일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성의 함락과 피의 보복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 1187년 9월 29일, 살라딘 군의 공격에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벽.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이런 상황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추적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기사 집안 출신으로 중근동에서 나고 자랐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는 왕족 출신 기사 발리앙(Balian of Ibelin)이 협상에 나선다. 발리앙은 성에서 이렇다 할 지위도 없는 데다 이전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붙잡혔다가 다시는 이슬람군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풀려났으니, 애초 자격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발리앙은 살라딘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자신의 조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적당히 군사를 조직해 성벽에 세워둔 발리앙이 살라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술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군대도, 무기도, 재물도 없는 상황에서 발리앙은 무엇으로 협상을 했던가? 그가 내세울 무기라고는 자신들의 터전이자 이슬람의 성전이기도 한 예루살렘 특별히 알 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비는 수밖에. 다행히 오늘날 서양에서도 이슬람의 성군으로 인정하는 살라딘은 발리앙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여 일정한 몸값만 받고 주민을 방면하는 데 동의했다. 성내에 돈이 부족하자 이슬람 병사들까지 동참하여 모금을 벌이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고, 그리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하나의 반전이라면, 그 와중에도 총주교는 숨겨둔 성물과 금은보화를 싸들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발리앙은? 그는 1189년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참전했고, 이번에도 리처드 1세와 살라딘 사이에서 중재 역을 맡아 평화 협정 체결에 일조했다. 발리앙에게는 대단한 권력도 지위도 자본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대의에 헌신하는 용기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상황이 누란의 위기라는데 공감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위기감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카밀루스와 발리앙 같은 인물을 새삼 돌아보는 이유다.

※ 김선태 주간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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