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겸 대기자] 렛츠런 파크라는 지명이 있다. 렛츠런파크(Let's Run Park)라는 이름만으로는 아마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원일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알고 보니 경마장의 바뀐 이름이다.

개명의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경마장이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게다가 마사회는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역 명칭도 렛츠런파크역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국토교통부에 제시했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다.

▲ 최성범 주필

홈쇼핑 채널을 돌려보면 외국어 세상이다. “이 재킷은 고트 스킨으로 만들어졌고요, 칼라는 브라운 화이트 블랙 세 가지에 올 사이즈입니다.” “모든 옷을 시즌리스로 만드는 매직아이템입니다. 니트 안에 원피스를 레이어드했어요.” 어느 나라 방송인지 알기 어려운 형편이다. 멀쩡한 한국어를 두고 억지로 영어를 쓰는 이유를 알기도 어렵다.

화장품 광고에는 안티에이징, 더마에센스, 리커버파운데이션, 더마데이션, 뷰티파우치 등 외국어가 난무한다. 어느 카드 회사 TV광고엔 ‘익스클루시브’, ‘슈퍼콘서트’, ‘컬처프로젝트’, ‘트래블 라이브러리’, '디자인라이브러리', '하우스오브더피플‘ 등 1분 남짓 짧은 시간에 영어 단어가 난무한다.

한국어 실종시대…국어사랑은 한글날만 연례행사처럼 반복

서울 지하철 전동차 출입문 앞에는 ‘출입문에 기대지 말고 버스킹플레이에 기대세요’라는 서울시의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길거리 공연 안내문인데 굳이 버스킹 플레이라는 외국어를 써야 할 이유가 헷갈린다.

서울시가 주최한 마라톤 행사의 명칭은 ‘We Run Seoul'이었다. ’서울을 달린다‘가 아니라 ’서울을 운영한다‘로 번역하는 게 아마 제대로 된 번역일 것이다.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등과 함께 5개의 국경일 중의 하나다. 한글날은 2005년도에 국경일로 지정됐다.

국경일 가운데 3ㆍ1절, 제헌절, 광복절은 알고 보면 지난 20세기에 국한된 사건일 뿐만 아니라 광복절을 제외하곤 역사적 평가도 엇갈려 굳이 국경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반면 한글날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한글이 제정된 날인만큼 그 의미는 각별하다.

다문화시대일수록 민족보다는 문자의 중요성은 커진다.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방송마다 한글의 우수성을 주제로 하거나 한국어 한류를 과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이처럼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외국어 홍수 속에 휩쓸러 가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글로벌 시대를 맞이해 외국에서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외래어도 유입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가 범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멀쩡히 쓰이던 우리말을 두고 외국어를 쓴다는 점이다. 고유명사가 아닌 경우 그 의미를 살려 작명하는 중국과는 대조적이다. 사물이나 현상의 정확한 내용을 묘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명칭만 외국어로 바뀌는 현상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한국어가 실종되고 있다. 어느덧 꽃은 플라워로, 결혼은 웨딩으로, 옷은 드레스로, 요리사는 셰프로, 미용은 뷰티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어가 사라지고 외국어가 한국어를 대체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는 한국 국민 전체가 외국어 명칭이나 단어에 새롭고, 품격 있으며 신뢰를 갖게 된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민간 기업들이 광고 문구에 외국어를 과다 사용한다고 해도 광고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현실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안도 없다.

공공기관과 언론사 등 공적 영역부터 표준어 정책 제대로 지켜야

그러나 공적 영역에선 다르다. 대한민국 표준어는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표준어로서의 한국어는 단순한 관습 그 이상이다. 정부가 규정을 통해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문화관광부 소속 국립국어원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 10월9일 한글날을 국경일을 삼아 한글의 창제의 뜻을 새기고 있지만 우리는 현재 한국어 실종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글날 570돌을 맞은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이야기에서 시민들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뉴시스

따라서 국가나 공공 단체는 법령, 공문서 등에 표준어를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들도 민간기업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추세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정책의 명칭을 보면 뉴스테이, 뉴타운, 핀테크, 뉴스타트, 로컬푸드, 룸세어링 등 한결 같이 영어로 정책을 명명했다. 한글로 표기했을 뿐 외국어다. 공기업 명칭도 코레일 등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외국어 남용에 가장 앞장서는 집단은 바로 언론사 그중에서도 방송사들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명칭도 언젠가부터 영어로 바뀐지 오래다. 오마이베이비, 마이리틀텔레비전, 모닝와이드, 뉴스타임, tm포츠매거진, 배틀트립, 해피투게더, 코리언지오그래픽 등 케이블방송은 물론 지상파 방송사들의 프로그램 명칭도 마찬가지 추세다.

방송이 공공재라는 사실을 거론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방송 출연자들도 어느덧 영어를 많이 사용해야 수준 높은 출연자가 된다는 듯 외국어를 남용하고 있다. 뮤지션, 아티스트, 콜라보, 세션, 케미 등 영어로 써야만 권위를 생긴다는 듯 외국어 남용에 앞장선다. 가수, 예술가, 협업 등의 용어는 거의 사어가 되어 가고 있다. 외국 영화 명칭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하는 게 관례가 된지 오래다.

전파력이 큰 언론사들의 영어 남용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한국어 표준어 정책을 포기하고 표준어에 영어를 추가하지 않는 한 정책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책임이 크다. 공공재인 방송 콘텐츠의 내용을 관장하는 위원회가 방송에서의 외국어 남용을 지금처럼 방기할 경우 어느 순간 표준어로서의 한국어는 그 설 자리를 잃고 만다.

한국어가 실종되면 한글도 당연히 실종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도 실종될 수 있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와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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