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어떤 책이 유익한지 또한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코노뉴스는 독자들에게 책의 내용과 특징을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선태 휴먼앤북스 주간의 서평을 싣는다./편집자주

▲ 김선태 편집위원

올 상반기 한국 독자를 찾은 가장 주목할 만한 외국 작가로 단연 앙투안 로랭을 들 수 있다. 열린책들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것도 2년이라는 시차를 지닌 두 편을 한꺼번에 번역해 내놓았는데 한 권을 손에 잡으면 다른 한 권을 놓칠 수 없게 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들에서 아주 유쾌한 기분으로 프랑스식 해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앙투안 로랭, 놀라운 이야기꾼의 등장

앙투안 로랭은 이 책 어딘가에서 “놀라운 재능을 지닌 이야기꾼이자 진정한 문장력을 지닌 작가”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은 그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출간된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이야기다.

스토리는 부드럽게 이어지지만 압도적이고 사실들은 가볍게 주어지지만 지배적이다. 얼핏 보면 “황금 사과나 마술의 돌을 손에 넣기 위해 왕국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숲을 헤쳐 나가는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이야기같지만 그 과정에서 독자들에게 자주 간단치 않은 물음을 던진다.

이야기는 다니엘 메르시에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모자를 가져가고, 이를 알게 된 아내 베로니크가 양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소린지 설명이 좀 필요하겠는걸” 하는, 긴장되지만 매력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실은 대통령이 자신의 곁에서 식사를 하게 된 순간, 그에게는 모든 것이 마치 예정된 일인 듯 진행되고 말았다. “그의 온 신경은 방금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이 상황이 지니는 비현실성 때문에 그는 자기가 이제 곧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고, 따라서 새 날은 아직 시작되기 전일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니엘을 두고두고 고무시킨 대통령의 육성, 그 특별함은 그가 직접 들어 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의 발언이라는 데 있다. “내가 지난주에 헬무트 콜에게 그 얘길 했지…….” 다니엘의 뇌리에 영원히 남을 자부심의 한 부분으로 새겨질 말이었다. ‘이 저녁 식사는 정망 초현실적이군’ 하고 생각할 정도로.

대통령이 잊고 간 모자를 들고 왔다면 당연히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애초 우리는 매우 찜찜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니엘의 한 마디가 이런 우려를 깨끗이 잠재운다. 누구든 그 모자를 가져가서 훼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건 비록 훔치긴 했지만 “완전히 훔친 게 아니라, 돌려주지 않았다, 정도로 말하는 게 맞아”라는 말로. 실제 다니엘은 모자를 잠시 보관하는 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모자를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엄청난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그가 약간의 무리를 범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는 정직한 사람임을 입증했다.

그건 그렇고 대통령의 모자를 쓰는 순간, 다니엘의 기분을 묘사한 장면이 대단히 초현실적이다. 모자를 잃어버리는 경험은 했지만 대통령의 모자를 쓴 경험은 해보지 못한 작가가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 냈을지 신기할 정도다. “머리 전체가 스파클링 아스피린 용액 속에 푹 잠긴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산소 방울들이 오래 전부터 마비되어 있던 부분을 슬금슬금 건드리는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와 비슷하게 환상적인 묘사를 펼친 적 있다. 13살짜리 소녀가 레이코의 육체를 애무하는 장면에서 “난 그만 머릿속의 퓨즈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로랭의 묘사는 확실히 그보다 자극적이고 적나라하면서 섬세하다.

대통령의 모자를 쓴 직후, 다니엘은 모자가 부여하는 권위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신한다. 모자는 그에게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평정심”을 부여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깃든 어떤 보편적인 원리와도 같은 것임을, 독자들은 다니엘의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될 것 같다. 평소라면 완고한 상사 장 말타르에게 맞선다는 건 “상상만 해도 혈압이 오르고 점심 식사 마지막 한 술을 놓자마자 잠잠해져 가던 위궤양기가 도질 일”이었지만 모자는 다니엘로부터 그런 공포를 단숨에 제거해 주었다.

오히려 모자를 씀으로써 “마치 진정한 다니엘 메르시에가 비로소 천하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이전의 그는 미완성 샘플 일종의 습작에 불과했다.” 다니엘의 독백처럼 모자 하나가 그에게 모자를 쓰지 않은 이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권위를 부여해 준 것이다.

우리가 대통령의 모자를 쓰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때문에 “그의 반박은 합리적이고 그의 발표는 명료하고 핵심을 찌른 것”이라는 설명에 독자 역시 동의할 것이므로,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본 소제텍의 재무 부문 수장 장베르나르 데무안이 그를 중용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여담인데, 데무안은 커피 마니아라면 혹할 만한 정보를 던지고 간다. “발자크는 하루에도 몇 리터 씩 마셨다더군.” 다른 여담으로, 생텍쥐페리는 “길들인 여우라면 평생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기억되는,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우정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글을 남긴 작가다.

다니엘의 돌발행동은 우연하게 생겨난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것이 모자를 매개로 그에게 스며든 대통령의 기운이므로 정확히 그만큼의 논리적이고 실제적인 근거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비록 대통령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 물론 대통령은 다니엘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장면을 통해 독자들은 대통령이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모자를 찾는 일에까지도, 그에게 개입하지 않았음을 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대통령의 도움으로 얻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승진 앞에서 다니엘이 아래와 같이 느끼고 중얼거리는 대목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이유다.

- 다니엘은 어렴풋이나마 그걸 느꼈다. 대통령의 무언가가, 나노 입자 정도로 아주 미세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형태로 그 모자에 남아 있으며, 그 무언가가 운명의 숨결을 품고 있다고. 감사합니다.

대통령의 모자가 단지 모자일 뿐이라면 그것을 가져간 사람들이 자신과의 특별한 연관성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한 가지 표식을 통해 모자와 주인공들을 긴밀하게 연결하는데 모자 안쪽에 금사로 수 놓인 프랑수아 미테랑의 이니셜, F. M. 이 그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적확하게 들어맞는 바람에 작중 인물들은 물론, 뻔히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읽는 독자들조차 주인공들이 모자에 부여하는 살가운 애정을 당연하게 여기라고, 유혹한다.

이니셜은 다니엘에게 자신이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해주는 주문이 되고, “현재는 호텔 방으로 요약될 뿐인 데다, 미래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던 파니 마르캉에게 자신의 불운을 과감하게 헤쳐 나가도록 지지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되찾은 창작의 영감으로 그녀는 발베크상의 영예까지 안게 된다.

절대 후각의 소유자로 불렸던 지난날의 명성을 뒤로 한 채 하루하루 절망 속에 이어가던 피에르 아슬랑에게, 모자는 수정 결정처럼 완벽한 전혀 새로운 향기 즉 ‘천사의 향조’를 만들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는 근거가 되어 그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가져다주었다.

「파시 가 16번지, 파리 16구」 말하자면 ‘귀족들의 영토’에 들어앉아 부와 명예가 주는 안락함에 파묻혀 현실도 미래도 외면한 채 무료한 삶을 보내던 베르나르 라발리에르에게, 모자는 귀족 연하는 무리들을 벗어나 ‘검은 피카소’ 장미셀 바스키아로 상징되는 파격적이면서도 확고하게 미래지향적인 세계로 뛰어드는 통로가 되어 준다. 그에게 들려주는 전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베르나르가 모자로 인해 새롭게 터득한 신념이기도 했다.

- 정부는 바뀝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건 바로 우리 삶의 흐름이지요.

“우연에서 맞이하는 기적의 순간들”

이렇게 멋진 모자라면 누가 갖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같은 모자를 주울 때가 왕왕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모자는 모자일 뿐이다. 아슬랑의 말처럼, 모자를 잃어버리는 일은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작중 미테랑 대통령의 말처럼 “모자가 자기 운명을 따라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 뿐이다. 물건은 지나가고 남는 것은 사람과 향기다. 작가가 책에서 독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작가 앙투안 로랭은 방한 기자회견에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말한 ‘작가는 훌륭한 마술가여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신조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마술이 이 책에서 펼쳐진다. 무언가 상실하고, 그것을 되찾는 과정에서 미스터리한 일, 마술 같기도 하고 기적 같기도 하며 환상적이기도 한 일을 겪으면서, 한 마디로 우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거듭남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놀랍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접어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 작가 특유의 작법이자 그의 소설이 지닌 매력의 원천이다.

여러 주인공들의 거듭되는 변화를 통해 작가는 인생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한다. 먼저 작가는 다니엘의 생각을 빌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은 언제나 지극히 사소한 세부 사항이 꼬리에 꼬리를 문 결과’라며 우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어 작가는 아슬랑이 겪는 놀라운 사건들을 정리하면서 그 자체로는 우연일 뿐인 사건들이 실은 우리의 내면을 자극하는 계기이며, 그로써 우리의 내면이 깨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우리는 삶에서 하는 각각의 선택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전에 존재하던 세계가 무효화되지는 않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지금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닌 상태로 살 수도 있을 여러 개의 삶이라는 숲을 감추고 있는 나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자의 주인은 실존 인물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다. 그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도 이 모자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예리하고 치밀한 작가의 상상력은 인정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미테랑은 권위와 약점을 동시에 지닌 대통령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자국 프랑스의 문화 역량을 크게 키웠으며 대내외 관계에서 높은 식견과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국론을 통합한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작가는 루브르 박물관 앞 동네 공원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그 유명한 유리 피라미드의 에피소드를 통해 자국 대통령을 향한 존경심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미테랑은 엘리제 궁을 놔둔 채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유지하다 혼외의 여인과 딸까지 두었고, 이것이 사후에 드러나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와 같이 은근하고 비밀스러운 미테랑 대통령의 면모를 엿보듯 그려 낸다. 레스토랑 여종업원의 미모에 눈짓하는 모습이나 파니 마르캉의 사진을 따로 떼내 보관하고 그녀의 서점까지 기록해 두는 모습, 이국 땅에서 가진 ‘자신의 비밀 만찬’에 다니엘을 ‘네 번째 동석자’로 초대하는 장면 등등. 그 모든 모습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자국의 대통령에 대한 어떤 거부감도 불러일으키지 않고자 만전을 기한다. 마치 대통령의 사생활이므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실제 프랑스 언론이 그러했다. 미테랑 대통령 사후 그의 사생활이 밝혀져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으로서 그의 치적이 흠집 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일부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르 몽드 지는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라는 기사로 대통령을 옹호했고, 미테랑 여사는 고인의 장례식에 혼외의 여인과 그녀의 딸과 함께 나란히 서서 남편을 떠나 보냈다.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미테랑의 사생활을 살짝 접한 듯한 착각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의 심리 속으로도 살짝 들어간 듯한 착각에 빠질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미테랑의 모자로 돌아와, 우리가 우연한 기회에 불쑥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던 어떤 순간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소설 속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모자와 함께 하던 밤이 바로 그런 순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런 다음 그는 옷을 벗었다. 그가 제일 나중에 벗은 건 모자였다. 그는 모자를 창문 곁 작은 원형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달빛 속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이처럼 이야기의 소재들은 지극히 프랑스적이면서 그것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게다가 반전의 키처럼 들려주는 <뒷이야기>는 애틋하기까지 하다.

둘, ‘빨간 수첩의 여자’

일상을 뒤바꾼 고상함의 기적

택시는 대로변 모퉁이에서 여자를 내려 주었다. 여자의 집까지는 고작 50미터. 여자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전자출입카드를 찾는 순간 손 하나가 핸드백을 낚아챘다. 여자는 잠시 저항하다 남자의 우악스러운 힘에 머리를 벽에 찧으며 쓰러졌다. 다음 날 아침, 여자는 혈종과 두개골 외상으로 혼수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 간다. 그녀의 이름은 로르 발라디에. 남편을 이라크 전장에서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으며, 벨페고르라는 이름의 반려고양이를 키우고 동성애 남자 동료와 아틀리에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금세공 전문가다.

훤칠한 외모의 중년 사내가 동네 길을 걷다 쓰레기통 위에 놓여 있는, 거기 있으면 안 될 것이 틀림없을 멀쩡한 핸드백을 발견해 집으로 가져간다. 그의 이름은 로랑 르텔리에, 영악한 고교생 딸 클로에를 둔 이혼남이자 유명 리포터인 도미니크와 사귀긴 하지만 곧 헤어질 운명에 처해져 있으며, 마을에서 꽤나 알아주는 근사한 서점 르 카이에 루주의 주인이다(도미니크와는 처음부터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두 사람의 가치관을 냉정하게 비교해 볼 때 독자 입장에서 빨리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미리 한 말이다).

쓸데없이 핸드백을 주웠다는 후회도 잠시, 남자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와인을 거듭 마신 다음 로랑은 “원시 부족들조차 조상 대대로 지켰을 것 같은 금기를 깨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자의 핸드백을 열어젖힌 이 남자에게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순간 같은 기묘한 상황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최초의 사건은 도미니크의 의심을 산 일이고, 그것은 당연히 모든 독자들이 기대한 것처럼 두 사람의 이별로 마무리된다.

로랑의 눈길을 끈 것은 핸드백 속의 어떤 물건이 아니라 단지 작고 빨간 수첩에 여자가 써둔 일상의 기록들이었다. 하지만 로랑은 내밀하고도 고독과 회한에 사로잡힌 글들을 읽어내려 가면서 점점 더 깊이, 본 적도 없는 여자에게 빠져들었다. 가령 “나는 사람들이 모두 해변을 떠난 뒤 물가를 따라 걷기를 좋아한다”라거나 “나는 ‘아메리카노’라는 칵테일 이름을 좋아하지만, 마실 때는 ‘모히토’를 더 좋아한다” 같은. 모히토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던가. 이어지며 남자를 사로잡는 그녀의 상상.

“나는 벨페고르가 남자가 된 꿈을 꾸었다. 제법 잘 생긴 남자였다. 우리는 엄청나게 큰 호화 호텔에 묵고 있었고, 바에서 술을 한잔하고 방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 내가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내 코에 자기 코를 살포시 얹었다.”

남자는 여자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지만 단서가 부족했다. 핸드백 속을 뒤져 찾아낸 최고의 성과는 현존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쓴 책 ‘한밤의 사고’ 정도. 그 책에 모디아노의 친필 글씨가 있었고, 그 중에 여자의 이름, 로르가 언급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모디아노가 프랑스 작가들 가운데 가장 포착하기 어려운 ‘인물 자체가 신화’라 불리는 작가라는 점이다(실제로 작가는 이 책을 모디아노에게 선물했다).

난관에 빠진 로랑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놀랍게도 클로에가 그를 절망에서 구한다. 아마 로랑은 일전에 이 아이가 자기를 ‘가지고 놀던’ 순간 한 대 갈겨 줄 것인지 체념할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 후자를 택한 일을 두고두고 기뻐하리라. 물론 입 밖에 내지는 않겠지만. 하기는 클로에가 아니었으면 로랑은 그녀가 한 물 간 향수를 고집할 정도로 과거에 집착하면서도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여성임을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모디아노를 만날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미친 듯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이임을 알게 되는, 이 맹랑한 딸이 로르에게는 또 무슨 충격을 줄 지 상상하며 책장을 넘겨 보라.

로랑이 로르에게 한 발짝 한 발짝 접근해 가는 과정은 아슬아슬 연결되는 추리와 단서 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 우연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우연, 하니까 작가의 다른 작품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에서 펼쳐지는 기막힌 우연의 연속을 떠올릴 만한데, 이 책에서 우연은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의 근거로 다가온다.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로랑과 도미니크의 이별 장면이다. 남자에 대한 오해를 이별의 확고부동한 근거로 삼아 즉시 행동에 옮기는 도미니크를 보며 로랑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삶에서 어쩌면 그리도 쉽게 사라져 버릴 수 있을까? 하긴 누군가의 삶에 들어갈 때도 그에 못지않게 쉬웠지. 우연, 어쩌다 주고받은 몇 마디 말 같은 것이 지속적인 관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우연한 사건, 주고받은 몇 마디 말이 그 같은 관계의 끝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이유에서 로랑은 이제 우연에 기대는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비록 우연히 로르의 빨간 수첩을 펼쳐 들었지만 그 속에서 어떤 필연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게 된다. 그와 같은 몸부림이 있었기에, 독자들은 로랑이 열쇠 꾸러미에 꽂힌 펜던트에서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 순간을 우연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울컥, 하며 가슴 저 안쪽에서 솟구치는 안도의 한숨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우연은 아니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은 도움이 로르로 하여금 로랑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연의 힘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듯하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자기가 없는 동안 며칠씩이나 집에 머물다 떠났다. 모르는 남자가 내 집에 왔다면 끔찍하지만 벨페고르는 그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이 의문을 풀어준 이는 역시나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노의사였다. 그가 로르에게 ‘그’가 왜 끔찍하지 않은 남자인지,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일 수 있는지 설명해 준다.

“이건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 불과합니다만, 나 같은 늙은 인간 혐오자는 이 세상에 모르는 여자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러 오는 옆집 남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누구나 처음 만날 때가 있는 법”

 

대단한 발견은 아니지만 이 책과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를 함께 읽은 독자라면 작가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앙투안 로랭은 두 작품 모두에서 자기 아내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동화 속의 인물 ‘푸른수염’을 즐겨 언급하고, 음식 이야기가 나올 때면 “레몬즙과 굴의 궁합”에 대해 늘어놓기를 빼먹지 않는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인용하거나 책꽂이에 꽂아놓고, 르 클레지오의 작품에 대한 호감 역시 감추지 않는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둘 다 지면을 넘길수록 궁금증을 배가시키며 작가의 현란한 입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모자’가 모자의 행방을 둘러싼 기상천외한 사건 전개로 유쾌함의 매력을 종횡무진 발산했다면 ‘수첩’은 사랑의 행방을 둘러싼 격정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초조함의 불화살을 마구 쏴대며 독자의 애간장을 태운다.

독자들은 장을 넘길 때마다 덜컥덜컥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다, 어느 순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대를 찾아 책 속으로 뛰어들고 만다.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한 사람의 일생에 단 한 번 찾아 들어 영원히 이어질 운명의 순간에 대한 기대로부터 독자들을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랑을 꿈꾸는 독자들을 위해 작가는 로랑과 로르가 끝까지 지켜냈던 바로 그, 프랑스 작가 알랭푸르니에의 글에서 찾아낸 소중한 삶의 태도 하나를 들려준다.

“삶의 일상 속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곤 고상함이 유일하다.”

※ 김선태 주간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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