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어떤 책이 유익한지 또한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코노뉴스는 독자들에게 책의 내용과 특징을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선태 휴먼앤북스 주간의 서평을 실는다.

김선태 주간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왔다. 김주간은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편집자주

 

게임의 법칙

▲ 『게임의 법칙』 정설아 지음, 한담희 그림. 책고래. 2016.09.05.

게임에 빠진 내 아이가 아파한다는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 여기 불행한 환경으로 인해 무너지는 아이들에 관한 잔혹 동화 한 편이 나왔다. 제대로 읽는다면 슬픔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들 이야기지만, 실은 우리 현실 저변을 구조적인 관계 속에 제대로 압축해 낸 파노라마 같은 드라마다.

책은 가난, 불행, 슬픔, 불안, 이별, 왕따, 차별, 분노, 증오, 기만, 폭력, 절도, 복수, 공포, 고립, 저 다채로운 고통들에 시달리는 한 아이를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최근 한국 사회가 그중 많은 부분을 우리 아이들에게 떠안기는 중이다.

종종 컴퓨터 게임은 아이들을 이 모두로부터 탈출하게 해주는 환상적인 도피처이자 놀이터가 될 수 있다. 동화는 이 점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게임에 몰입한 아이와 그 주변 환경을 씨줄과 날줄처럼 칭칭 엮어 비밀스런 입체화를 그려낸다.

게임에 빠진 아이 통해 사회 저변의 비극 드러내

초등학교 5학년 지호는 몸집도 작고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동생을 아끼고 엄마를 사랑하는 착한 아이다. 작은 가전제품 가게를 운영하는 아빠는 술 때문에 병원까지 다녀왔지만 나름 성실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동네에 대형 전자제품 대리점이 들어오면서 손님 발길이 크게 줄었고, 아빠는 그 뒤로 다시 술을 입에 댔다. 생활 형편은 어려워지는데 아빠는 취해서 엄마를 못 살게 굴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일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생활도 꼬여만 갔다. 덩치 큰 싸움 대장 구기훈이 지호를 ‘땅콩’이라 부르며 괴롭히기 시작한다. ‘고릴라’ 기훈이는 지호를 고자질쟁이로 오해해 사사건건 괴롭히고 야동이 담긴 자신의 스마트폰을 지호 것이라 우겨 공개 망신을 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폭우 치던 날 만취해 들어 온 아빠는 곡예하듯 난동을 피웠고 엄마는 집을 나갔다.

이 무렵 지호 앞에 한 아이가 나타났다. 자신을 ‘킹’이라 소개한 아이가 알려줘 찾아간 곳은 철거된 채 방치된 아파트 상가 건물 지하. 평소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지하 계단 아래에 멀쩡한 PC방이 있었다.

지호는 킹에게서 배워가며 빠른 속도로 게임 실력을 키웠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동생 지홍이와 함께 그곳을 찾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빼면. 킹이 시키는 대로 게임 상대를 고릴라로 삼아 총을 쏴서 까만 비눗방울로 만들었는데, 학교에 와 보니 고릴라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평소 자기를 우습게보던 아이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심지어 축구 시합 주장까지 맡기는 것이다.

▲ 게임 아이템을 사기 위해 돈을 훔치며, 지호는 서서히 괴물로 변해간다.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지호는 미워하는 아이들을 게임에 소환해 비눗방울로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사라져갔다. 다음에는 게임 아이템을 구하는 게 문제였는데 그 때 킹이 제안해 왔다. 돈을 훔쳐 사라고. 한 번 두 번 훔치는 데 성공하자 지호는 점점 대범해져 학교 교무실에 숨어들고, 엄마의 액세서리에도 손을 댔다. 지호는 PC방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자 동생을 돌보는 일도 귀찮아졌다. 정신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리는 지호에게 지홍이가 다가와 배고프다며 칭얼댔다.

“형아, 가자니까!”

“아, 이 ** 진짜…….”

지호는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던 날 다정하게 “우리, 엄마 올 때까지 밖에서 놀까” 하며 대신 동생을 보살피던 형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호 눈에는 게임 말고 보이는 것이 없었다. 선생님이 자신을 다그치자 지호는 게임에서 선생님을 ‘터뜨려’ 버렸고, 아빠가 내던진 전화기에 이마를 다친 날 마침내 아빠도 ‘까만 비눗방울’로 만들어 버렸다.

▲ 아이의 총에 맞는 ‘대머리 독수리’는 바로 지호의 담임 선생님이다.

제정신이 아니게 된 지호에게 킹은 게임 속 세상이야말로 완벽하며,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이라고 다그친다. 아빠를 ‘없앨’ 결심을 하던 순간 지호의 가슴을 지배한 생각에서,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는 아이들이 향할 비극적 종착점이 암시된다.

-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을 없애야만 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나는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떤 어른도 아이를 방치할 권리는 없다

1994년 개봉되어 탄탄한 스토리와 기술적 완성도 거기다가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져 높은 인기를 누린 동명의 영화 「게임의 법칙」이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용대(박중훈 분)는 성공을 위해 미래를 약속한 연인 태숙(오연수 분)을 포주에 넘기고 그 대가로 챙긴 돈을 밑천 삼아 주먹 세계로 들어선다.

이 황당한 설정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질 정도로 허술했던 시절이지만 그 제목에서 말하는 게임의 법칙은 이 책의 정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원하는 돈을 구한 용대가 게임을 버리고자 했지만 법칙은 그가 현실로 되돌아가게 놔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호가 게임을 버리고자 했을 때도 법칙은 아이가 현실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침내 사건이 환상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실제의 모습으로 결말을 드러낼 때, 독자는 이 책을 단순한 초등 고학년 동화로만 대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지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게임 속 세계는 현실을 대체하는 달콤하지만 위험한 유혹이다. 저자는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글을 썼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인터넷 게임을 처음 접해 실력을 발휘하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데 고무되었다. 그와 비례하여 게임에서 점점 헤어나기 힘들어졌고, 밥을 굶고 잠을 설치기 일쑤였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보내기도 했다고. 더욱 문제는 게임을 하면서 전에 없이 난폭한 성격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지면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아이템을 사기 위해 나쁜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또 엄마한테 혼이 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탱크를 쏴대면서 화풀이를 하곤 했어요.”

증세가 점점 심해져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서 게임 속 캐릭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윽고 게임 속 세상과 현실이 뒤섞이게 된다. 그런데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면 자력으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평소의 자신과 달리 “승리에 집착하고 화를 참지 못하며 때로는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버린 자신을 보게 된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독’에서 ‘폭력성’으로 - 저자에게 “둘은 동전의 앞뒤 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 나아가는 아이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부모가, 가정이 자신의 아이를 보살필 수 없고 사회가 그들을 대신할 수 없을 때, 서서히 허물어지는 아이를 누가 붙잡아 일으킬 것인가?

‘상위 1%’가 아니면 누구도 안심할 수 없게 된, 갈수록 빈곤을 양산하며 안전망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당해야 할 고통들이 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언제든지 게임의 법칙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동심을 잃고 어쩌면 삶의 여명기에나 겨우 간직할 수 있을 순수의 시대를 차창 밖 풍경처럼 손 쓸 도리 없이 놓치고 만 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로 변할 수 있다. 착한 아이 지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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