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 김선태 편집위원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어떤 책이 유익한지 또한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코노뉴스는 독자들에게 책의 내용과 특징을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선태 휴먼앤북스 주간의 서평을 실는다.

김선태 주간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왔다. 김주간은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편집자주

 

잉글랜드-프랑스 왕국 간의 백년전쟁이 막 시작된 1347년 당시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칼레.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기세등등하게 진군해 온 영국 군대에 맞서 칼레 시는 결사항전을 벌였다. 시골 소도시의 뜻하지 않은 저항에 1년을 낭비한 에드워드 3세는 모든 시민을 죽일 것이라 공언했다.

마침내 시가 항복을 선언하고 백기를 든 사절이 자비를 애원하자 영국 왕은 잔인한 조건을 내걸었다. 도시를 대표하는 시민 여섯 명이 처형을 자처한다면 도륙을 재고하겠다는 것이었다.

칼폴라니, “시장지상주의는 환상이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자 재력가로 명성이 높은 귀족 위스티유 드 생 피에르가 먼저 나섰다. 뒤를 이어 시장과 상인들 그 아들들이 나서 자원자는 일곱이 됐다. 한 사람이 죽음을 양보해야 할 상황이 되자 위스티유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 광장에 가장 늦게 나오는자를제외시키자고. 이튿날 아침 차례로 여섯 명이 모였지만 생 피에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분개한 가운데 생 피에르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들은 먼저 죽음을 선택했다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전했다.

“걸어 나가라, 빛 속으로.”

이 말을 가슴에 새긴 여섯 명은 영국군대로 당당하게 나아갔고, 급기야 아이를 밴 왕비까지 만류하는 바람에 에드워드 3세는 그들 모두를 돌려보냈다.

세계경제가 금융공황의 늪에서 아직도 탈출하지 못한 지금,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처럼 거론되는 위스티유 드 생 피에르의 사례는 고객에 대한 기업의 책임, 나아가 사회에 대한 시장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장이 사회로부터 독립해서 운영되는 경우를 가정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야기될까? 이 문제에 천착해 시장지상주의의 위험성을 간파한 칼 폴라니는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유토피아”라며 “그런 제도가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가 마를 것”이라고 단언했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자유방임 시대 역시 국가에 의한 계획의 산물로서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시장경제가 지구촌을 대표하는 유일한 경제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탓에 많은 경우 시장경제에 이로운 것이라면 사회에도 이로운 것이라는 일종의 등식이 형성된 듯하다.

이 때문에 시장은 사회와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기제를 거침없이 발휘하게 됐는데, 다름아닌 무절제한 이윤추구와 그에 따른 ‘공황’이다. 사회적 측면에서 공황은 극단에 이른 시장만능주의가 자신과 함께 사회 시스템마저 붕괴시키는 전형적인 결과물이다.

21세기 들어 전 세계가 단일 시장경제 네트워크 안에 들어서면서 그 위험은 이전 어느 때보다 커지게 됐는데, ‘블랙 스완’의 저자 탈레브는 ‘괴물 같은 기업들이 파리처럼 추락하는 모습’이 더 자주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란 것도 기실 다가올 쓰나미급 공황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에는 시장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에 지배되므로 강한 기업이건 큰 기업이건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애덤스미스, “도덕적인 사회가 살아남는다”

역사적으로 기업이 사회를 챙길 때 시장과 사회가 더불어 성장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때로는 그 역할이 한 시대의 특징을 결정하기도 했다.

산업자본의 성장이 절정기에 이른 19세기 초, 유럽 전역은 대내적인 정치불안과 권력이동, 대외적인 군비 확장과 무역전쟁 나아가 식민지 쟁탈 경쟁 등으로 종종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15년~1914년 사이 1백년 동안 유럽은 1년도 지속되지 않은 보불전쟁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였다. 근대 시장경제가 시작되기 전인 17,18세기에도 매 세기마다 6,70년간이나 전쟁이 벌어졌던 것과 크게 대조되는 사실이다. 그 배경과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이 유럽 최대의 금융가문은 각 가족 단위로는 개별 국가에서 금융활동에 종사하지만 전체로 보면 국제주의라는 대원칙 아래 국가간 분쟁을 조정하는 막후 교섭자 역할을 강력하게 수행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지금까지도 세계 금융권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어지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각각의 경제 단위로 개별화시켜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간 전쟁이 그들 전부를 공멸로 몰아넣을 가능성으로 인해, 로스차일드가에게 ‘유럽 평화수호’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문의 신조였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회적 이해관계가 당대 최고의 기업조차 사회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든 경우다.

반대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시장경쟁을 배제하려 한 경우도 있다. 1795년 영국 버크셔주 스피넘랜드 지방 판사들은 주 내 빈민들에게 그들의 일자리 유무와 상관없이 가족의 최저생계비로 빵 가격에 연동한 비용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경우건 적정 수당을 받게 된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게 됐으며 순식간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최저생계비로 연명하는 극빈자로 전락했다. 결국 40년이 지난 1934년 빈민구호소의 강제 철거와 함께 이 제도도 영원히 사라졌다. 일단 산업화가 시작된 이상, 시장경쟁 없는 사회가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보여준 경우다.

애덤 스미스는 명저 '국부론'에서 비록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동기가 인간의 이기심이라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 계급을 도덕성이 없는 집단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의 원천으로서 검약과 자제의 힘을 누구보다 중시했으며 이를 무시하고 사치와 낭비를 즐기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귀족주의적 관습을 경멸했다.

스미스는 ‘현명하고 도덕성이 높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소수일 것이지만 그들이 이해타산을 넘어선 관용과 희생의 정신을 가질 때 사회는 비로소 지속적인 번영의 길로 접어든다고 믿었다. '국부론'에서 '도덕감정론'에 이르기까지, 스미스는 시장과 더불어 한 사회가 살아남으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이 최소 일부만이라도 존재해 고급 덕목을 지켜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부에대한집착, 시장 토대 뒤흔들어

오늘날 세계 경제는 시장으로 통일되어 있고 다시 시장은 주민들의 경제생활에서 핵심적인 공간이자 수단이며 터전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시장보다 강력한 사회시스템은 없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시장 통제장치였던 사회주의체제는 스스로 무너져 지금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서만 존립가능한 제도가 됐다.

그리하여 지난날에는 사회가 시장을 다스렸으나 이제 시장이 사회의 생명줄을 쥐게 된 탓에, 급기야 “사회가 시장에 딸린 부수물로 운영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폴라니, 슘페터, 케인스 등 현대 경제학계의 거장들이 한결같이 경고했던 바다.

미 하버드대 로버트 콜스 교수는 “월가 엘리트들에게 전략은 있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없었다”는 반성을 제기했다. 그 결과는? 시장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면 윤리는 사라지고 사회는 탐욕의 희생물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2006년 발생한 뉴저지주 비리사건은 그 처참한 일면을 보여준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그 해 5월 시리아계 유대계 공동체의 금융사기 사건과 관련, 사건 제보자를 2,500만달러라는 거액 부도수표 발행 혐의로 체포했다.

그런데 그는 사건의 주변 인물에 불과했고, 차례로 터진 비리에 주 산하 시장 3명 주의회 의원 2명 유대교 율법교사(랍비) 5명을 포함해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 44명이 줄줄이 연루돼 있었다. 공직 비리의 전형을 보여 주듯 개발업자들이 뇌물과 선거자금을 제공했고 이어 국제적 규모에서 자금세탁이 행해졌다. 정부 산하 기관의 행정처리나 법률 조항 완화 같은 특급 편의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뇌물 가운데는 사과상자로 10만 달러가 건네진 경우도 있다.

랍비들이 개입한 경우는 더욱 가관이었다. 빈민층 사람들의 신장을 1만 달러에 사서 16배로 뻥튀기해 파는 장기매매에 나섰는가 하면, 구찌·프라다 등 유명 메이커 제품을 위조판매하고, 주차장 부지와 식당차 등에서 주식에 이르기까지 돈 되는 건 뭐든 불법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모든 거래의 배후에 해당 시의 최고위층이 똬리 튼 채 앉아 있었다.

3년에 걸쳐 진행된 수사 결과 이 사건은 2009년 7월 뉴저지주 시장 3명과 주의회 의원 2명을 포함해 44명이 한꺼번에 체포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주 검찰은 “이들에게 윤리라는 개념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고 밝혔다.

과학계에서 빅뱅이론의 성지로 여기는 뉴저지가 한 순간에 사악함이 판치는 소돔으로 화했으니, 사회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시장만 남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결과가 이것이다. 케인스가 말했듯이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윤리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영자가 시장과 사회에 몰고 올 충격이 사악한 졸부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바 없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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