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타인에 대한 인간의 공격 본능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 김선태 편집위원

동서양의 영웅 신화에 공통된 원형을 제안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조셉 켐벨은 인간 공격성의 심리학적 기원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 이원일체(二元-體) 상황을 형성한다.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조셉 켐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17쪽.)

사회적 산물인가 유전적 본성인가

말하자면 켐벨은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또는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관계 설정에서 유추하여, 인간의 공격성이 신생아 시기부터 각인되고 내재되는 성향이라고 진단한다. 세상 모든 영웅 신화의 바탕에 하나의 공통된 ‘영웅 원형’이 자리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인간 심리의 바탕에 하나의 공통된 ‘공격 충동’이 잠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격성이란 단지 사회적 산물이라며 자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워드 윌슨은 진화론과 분자 생물학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유전자 수준까지 추적한 끝에 이러한 가정을 부정한다. 윌슨에 따르면 “생물학적 분석의 결과 공격성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DNA에 각인된 본성”이다. 인간은 잡식성 영장류로 이 동물군에 어울리는 공격성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어서 일상적으로 적과 아를 구분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영장류들에게 공격성과 사회성은 그 초보적 형태에 있어 동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마 침팬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다운 행동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사냥할 때 펼치는 지능적이고 협동적인 기동 작전일 것이다. 보통은 어른 수컷들만이 동물을 사냥한다. 이것은 영장류가 가진 또 하나의 형질이다. 버빗원숭이(긴꼬리원숭이의 일종)나 어린 비비 같은 동물은 사냥감을 점찍고 나면, 침팬지의 자세, 움직임, 표정은 현저하게 달라진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신호로 보낸다. 다른 수컷들은 표적이 된 동물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털을 곤두세우고 긴장된 자세를 취하면서 소리를 죽인다. 대개 침팬지는 가장 소란스러운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 관찰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뚜렷한 변화다. 이 경계 상태는 거의 일시에 돌진하는 신속한 공격으로 이어진다.”(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54쪽)

하지만 이와 같이 초보적인 유사성을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하여 윌슨은 인간 사회에서 그 반증을 찾아낸다. 그는 오늘 가장 평화를 애호하는 부족이 실은 어제의 파괴자였기 일쑤이고, 그들은 미래에 다시 군대를 조직하고 살인자들을 배출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기와 지역에서 사례를 찾아낸다.

“현대 쿵 족의 어른 세계에서는 폭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는 그들을 ‘무해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리 오래전도 아닌 50년 전, 이 ‘부시먼’의 인구 밀도가 지금보다 높고 이들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느슨하게 받고 있던 시기에, 그들의 1인당 살인율은 디트로이트나 휴스톤에 맞먹는 수준이었다.”(130쪽)

“냐에냐에 부시먼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이웃이 소중한 식물 식량을 채취했다면, 그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의 왈비리 족은 우물에 특히 관심을 둔다. 어떤 무리가 다른 무리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고, 침입자들은 살해되기 일쑤였다.”(139쪽)

“브라질의 문두루쿠 족 인간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적을 말 그대로 사냥감으로 여겼다. 인간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 온 자에게는 높은 지위가 주어졌다. 초자연적인 숲의 힘을 부여받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쟁은 고급 예술로 승화되었고, 다른 부족들은 위험한 동물 무리로 간주되어 노련한 사냥꾼의 사냥감이 되었다.”(142쪽)

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서 윌슨은 “인간의 공격성은 타고난 것일까”라고 자문한 뒤, “그렇다.”고 답한다. 어쩌면 원시부족에게 공격성은 부족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윌슨에 따르면 ‘잔인성과 용맹’이라는 형질은 ‘그것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위의 문두루쿠 족만 보아도 양질의 단백질 부족 때문에 인구가 늘지 않았고, 게다가 경쟁 부족인 페커리 족과 사냥 지역이 겹쳐 항상적인 전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는 인간 사냥이 자신들의 수확물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인간에게 특징적인, ‘과도한 적개심’

문제는 인간이 이와 같은 공격성을 수렵 채집 사회부터 산업 국가에 이르기까지, 주로 전쟁 기술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고 그 결과 다른 동물들과 차원이 다른 폭력성으로 키워냈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에 크고 작은 전쟁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실제로 지난 3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대략 그 기간의 절반을 전쟁으로 보냈다.”(129쪽)

▲ 『인간 본성에 대하여』 = 에드워드 윌슨 저, 사이언스북스 간, 2017년 2월 3일.

그 결과는 무엇일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과도한 적개심’이 그 답이다. 이에 관해 윌슨은 다음과 같이 생물학적인 진단을 내린다.

“인간은 외부의 위협에 비합리적인 증오심으로 반응하고, 꽤 넒은 여분의 범위까지 고려해 그 위협의 근원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성향이 강하다. 우리의 뇌는 다음과 같은 범위까지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 같다. (먼저) 우리는 사람들을 동료와 이방인으로 구분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동에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공격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런 학습 규칙들은 지난 수십만 년에 걸친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진화해 온 것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런 규칙들을 최대한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에게 생물학적 이익이 제공되기 쉽다.”(151쪽)

가까운 우리 현대사에 한 사람의 공격성이 과도한 적개심으로 발전하여 처절한 비극을 낳았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그것이다. 윌슨이 앞서 사용한 용어를 그에게 적용시키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5·18 당시 ‘사살 명령’을 내린 정황이나, 무자비한 진압 계획에 ‘굿 아이디어’라 치켜세운 정황을 보면, 그가 광주 시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나 ‘위험한 동물 무리’, 또는 ‘사냥감’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현대사에 유례가 없는 광주의 진압은 더 나아가 그의 공격성이 사이코패스 수준의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심증을 굳게 한다.

5·18의 진압 방식이나 이후 처신을 보면 전두환의 공격성은 군인의 그것이 아니고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그것과도 다르며, 오랜 세월 학습되고 축적되고 내면화된 적개심의 발로다. 윌슨의 형질 개념을 써서 말하면 그의 공격성은 어릴 때는 ‘용맹’으로, 자라서는 ‘잔인함’으로 덧칠해졌으며 군대와 전쟁과 정치를 통해 ‘살육성’까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5·18과 ‘사이코패스 도살자’의 탄생

어린 시절에는 가난의 고통과 어머니의 집착 같은 압력이 평범할 수 있었던 공격성을 비정상적으로 증폭시켜 그를 동네 악바리로 키워냈다. 6.25 자원입대를 시작으로 서서히 공격력을 전투력으로 발전시키며 적성에 맞는 군인의 길을 걸었다. 천운이 닿아 5·16에 반대하는 육사교장을 밀고하여 박정희의 눈에 들었고,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출세가도 속에 적군과 아군으로 피아식별하는 능력을 고도로 배양했다. 1951년 육사 시절 만든 오성회를 박정희 집권 이후 하나회로 확대, 오직 자신의 때를 노렸다. 그러다 10·26 사태로 절호의 기회를 맞아, 일개 소장 신분임에도 12.12 쿠데타로 상관인 정승화 육참총장을 제거하고 군권을 움켜쥐었다.

주저 없이 대권 행보에 나선 그는 1980년 민주화운동의 저항에 부딪히자 보통 사람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이를 해결했다. 광주 시민을 북한군과 결탁한 폭도로 둔갑시켜 무자비하게 살상, 그로써 야기된 공포심으로 단숨에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아마도 역사는 그를 유년기부터 배양된 공격적 성향에 무수한 훈련으로 단련된 악마적 적개심을 무고한 다수의 사람에 대하여 아무 제한 없이 극단까지 쏟아 부은 ‘인간 도살자’로 기록할 것이다.

한 가지 더, 그의 심리적 특성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브르크하멜 국립연구소가 정의한 대로, 감정을 관여하는 전두엽이 일반인들처럼 활성화되지 않아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뿐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 오랜 세월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즉흥적인 행동 습관을 유지해 왔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정의란 곧 사이코패스(반사회성 인격장애)의 그것이며 전두환은 이에 기초하여 야만성, 무자비함, 살육본능이라는 압도적 공격성을 발휘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비록 공격성이 인간 DNA에 고정된 형질이라는 결론에 이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윌슨은 인간 진화가 이를 통제하리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비록 인류의 생물학적 본성이 조직화한 공격성을 탄생시켰고 수많은 사회의 초기 역사를 개략적으로 지시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기는 하지만, 진화의 최종 결과는 점점 합리적인 사유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있는 문화적 과정들을 통해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엄밀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류는 당장 그러한 전망이라도 갖지 않으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을 처지에 몰려 있어서, 윌슨의 말처럼 “문명은 문화적 진화와 조직화한 폭력의 상호 협조적 추진력을 통해 발달해 왔고, 우리 시대의 문명은 핵 전멸의 일보 직전까지”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후 수단으로 이성을 사용한다.”(148쪽) 아바 에반의 이 말을 소중하게 새겨야 할 이유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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