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의 정치시평

별세를 애도하며, 되짚어본‘반(半)직접민주주의-의사결정 분배’

[이코노뉴스=김홍국 편집위원] 성하로 접어드는 유월의 마지막날인 30일 오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향년 87세.

지구촌의 디지털혁명, 정보통신혁명, 사회혁명, 기업혁명, 기술적 특이성을 언급하며 문명의 변화를 진단하던 토플러 박사의 운명은 지구 문명의 큰 손실이고 아픔이다.

▲ 김홍국 편집위원

그는 1980년 출판한 <제3의 물결>을 통해 정보화 혁명을 통찰하며 재택근무, 전자정보화 가정 등의 용어를 제시하며 문명의 충격을 줬고, <미래쇼크>(1970년), <권력이동>(1990년), <부의 미래>(2006년) 등의 책에서 인류와 사회변혁 및 자본주의의 발달 방향을 예측하는 혜안으로 인류의 미래를 진단해왔기에 그의 별세는 인류의 큰 상실이고 슬픔일 것이다.

1928년 미국 뉴욕 출신인 토플러 박사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뒤 5년간 용접공으로 노동 현장을 경험했고, 이어 언론인으로 변신해 미국 의회와 백악관 출입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경제전문지 〈포춘〉에서 칼럼니스트로 지내며 노동과 문화와 관련된 글을 썼으며, 와병 전까지 코넬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통찰력과 예지력 가득한 저술과 강연 활동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던 그는 과학, 문학, 법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섯 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3의 물결’ ‘미래쇼크’ ‘권력이동’...통찰력 가득했던 삶

그는 1960년대 이후 숱한 저술과 칼럼을 통해 소련의 해체, 독일 통일, 동아시아의 발전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분석하고 전망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2006년 세계를 움직인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던 토플러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1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21세기 한국비전’ 보고서를 작성해 생명공학과 정보통신의 융합을 통해 한국이 산업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무명의 언론인에서 세계적 지식인으로 도약한 것은 세 권의 책이 바탕이 됐다. <미래 쇼크>(The Future Shock)에서는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줬고, <제3 물결>(The Third Wave)에서는 인류가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정보화혁명으로 가고 있다는 혁신적인 예지력과 예측력을 보였다. <권력 이동>(The Powershift)에서는 앞으로의 세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세계적인 미래학자로서 활동하던 그는 2006년 <부의 미래>(Revolutionary Wealth)에서는 미래의 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그 부를 지배할 것인지를 다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진단한 <불황을 넘어서>(Beyond Depression), 새로운 전쟁 형식의 출현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반전쟁을 이야기한 <전쟁 반전쟁>(War and Anti-War), 새로운 문명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주제로 서구 지식인들과 나눈 대담을 정리한 <누구를 위한 미래인가>(Previews and Premises) 등도 지구촌에 다양하고 풍요로운 영감과 지혜를 나눈 책들이다.

시민 스스로 미래 준비하고, 제도와 싸워 인간권리 지키라

▲ 고(故) 앨빈 토플러 박사/뉴시스 자료사진

토플러는 시민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현대정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정치는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와 입법부, 정당 등 기존 정치조직은 여전하지만 상당의 권력은 정보통신에 기반한 풀뿌리 집단과 미디어로 이동해가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2013년 펴낸 <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Creating a New Civilization)에서 제3물결을 새로운 문명창조로 보고 정치가 변해야 한다며, 옛 정치질서가 어떻게 몰락해가고 미래사회를 지배할 새로운 정치질서의 방향에 대해 제안했다.

그는 가치관과 철학, 시대정신의 빠른 변화 속에 정치권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갈라져 싸우는 양상만 벌이는 정치시스템의 위기는 사람들의 자신감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며, 현실정치의 정체 현상을 우려했다.

그는 정치에 의해 제도와 규칙 등 사회구조가 바뀌게 마련이지만, 아직 제3물결 세대가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제3물결 정치가 이뤄져야 새 문명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정치의 이동’은 ‘제3물결 정치모델’로의 성공적 전환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3물결 정치모델로 ‘반(半)직접민주주의’와 ‘의사결정의 분배’를 제시했다.

기존의 정치시스템은 사람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원래의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폐기처분하고, 혼합형 창의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새로운 방식에 따르는 불확실성과 리스크,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우선 좁은 지역에서 실험을 거친 후 더 넓은 범위로 적용해볼 것을 권했다.

그는 또 지방으로의 권력 분산화를 새로운 정치의 핵심원리로 제시했다. 의사결정의 부하를 분산하고 의사결정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의사결정 권한을 이양해주는 것이다.

단순히 정치적 리더를 자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분배야말로 시스템의 무력화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의사결정의 분배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며, 매우 악랄한 지역의 독재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많은 경우 지방정치는 중앙정치보다 훨씬 더 부패해있는 게 현실이며, 게다가 중앙의 의사결정권자들이 핵심적인 의사결정은 전부 다 중앙에 존속시킨 채 귀찮은 것들만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폭적인 권한 분산만이 정치적 기능 회복의 길이라고 본다. 대량ㆍ집중화에서 분산ㆍ지역형으로 변화하는 추세에 정치가 어떻게 발맞춰 나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전폭적인 권한의 분산화가 없다면 많은 정부들이 정치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문제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사결정의 부하를 나누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을 지역 수준으로 내려보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대부분의 정치적 리더들은 외부로부터 강력한 압박을 받거나, 위기 상황이 심각해져 그대로 두었다가는 폭력적 혁명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갖기 전에는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고 리더십의 위기를 설명한다.

결국 변화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우리 시민 자신에게 있으며,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해야 하고, 신기하고 놀라우며 급진적인 것들 앞에서 서둘러 생각을 닫아버리지 않도록 스스로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무리 불합리하고, 압제적이고, 진부한 것이라 하더라도 기존의 제도들은 지키려 하는 반면, 새로이 제안되는 제도들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대로 죽이려 하는 이른바 ‘아이디어 암살자들’과도 싸워야 한다고 투쟁을 제안한다.

아무리 사회에 이단적인 사상이라 하더라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극는 기존 정치 시스템의 붕괴가 폭군의 출현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혼란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로의 평화로운 전환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지금 당장 ‘제3 물결 정치 모델’로의 전환을 시작한다면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 구조만이 아니라, 문명 그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짜릿한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세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제2의 물결 혁명을 이루어냈던 앞선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세대라는 것이 <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에 드러난 그의 생각이다.

권위주의, 독선과 불통의 한국정치, 성찰의 계기 맞아야

한국정치는 21세기 들어 많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주의적인 다양성과 시민의 권리가 존중되기는커녕 불통과 독선의 정치, 시민을 배제한 권위주의적 통치로의 회귀로 인해 시민의 가치와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정치가 공권력과 권력의 횡포를 동원해 군림하면서, 언론의 자유가 속박당하고 시민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다. 갑들의 횡포 속에 을이 된 시민들은 사회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위험사회에서 사회를 불신하고 회의하고 있다.

청년들의 삶은 비정규직과 실업난 속에 절망 속에 고통받고 있고, 중장년층은 조기퇴직과 불안한 미래, 갈수록 취약해지는 삶의 수준과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한국정치가 과거 1987년 헌법 체제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도리어 과거로의 회귀라는 미망에 머물고 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시민의 가치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과거 권위주의와 냉전시대로 복귀하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지구촌의 미래를 전망해온 석학 토플러의 87년에 걸친 탐구와 도전 가득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그가 제시한 정치의 미래를 탐색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 김홍국 편집위원은 문화일보 사회부·경제부 기자, 교통방송(TBS) 보도국장을 지냈으며, 경기대 겸임교수(정치학)로 YTN 등 보도 및 종편 TV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문 패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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