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이 술술 마음먹은 대로 풀리기를 원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 김선태 편집위원

영웅이건 천재이건 예외가 아니며 인생의 섭리를 꿰뚫은 동서 고전 어디서나 이 점을 강조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 속담도 있지만 하늘의 운을 거머쥔 순간에도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완벽한 성취를 주지 않는다. 주역에서도 이를 강조하여 군자 유유해 길(君子 維有解 吉-40괘), 즉 군자는 오직 해결책을 찾는 사람이며 그럴 때 비로소 길하다 하였다.

젊은 추사, 조선 대표 지성의 탄생

비단 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의 독립된 인격을 부여받지만 그 인격은 삶의 어느 순간에도 완성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미완성의 숙명을 지닌 존재인 이유로 해서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자유의지를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적용하면 인격이란 부단한 자기부정을 통해 형성되어 가는 인생 여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의 인격을 일련의 과정의 산물로 볼 때 숱한 간난신고 속에서도 전진을 거듭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이는 대단히 드물다. 우리 역사를 들춰보면 이같은 경지에 이른 몇 안 되는 이 가운데 추사 김정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추사 김정희』 = 유홍준. 창비. 600쪽. 2018년 4월 20일.

추사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자이며 그 자신 고전 학예 연구자로 일가를 이룬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기존의 『완당평전』에 15년간의 노력을 보태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를 여느 대하드라마 못지않게 웅장한 필치로 복원했다. 완당 평전이 미진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시까지 저자의 손이 미치지 못한 추사의 작품이 많았기 때문인데, 긴 세월 매진한 결과 엄청난 전진을 이루었던 것이다.

추사는 시서화(詩書畵) 전반에 걸쳐, 즉 시·평·감상·서예·회화·고증·금석학 나아가 유학·불교·다도 이론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학예의 최정상을 차지한 데다 수많은 제자와 아류를 낳았다. 이 책에서 자세히 밝히듯이 당대 청조학(청나라 시서화 연구)의 제 1인자라고도 할 정도로 다룬 분야가 심원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그런 추사의 작품 세계를 책에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들어가 수많은 기복 속에서 자신의 예술과 인격을 고양시켜 마침내 학(學)·예(藝)·인(人) 합일에 이르는 추사의 모습을 가급적 냉정한 필치로 독자에게 제시하려 했다. 독자들이 전형적인 천재의 면모를 지닌 추사를 넘어 인간의 품격에 대한 모종의 감동적인 단서를 이 책에서 얻을 것이라 믿는 이유다.

한 인간으로서 추사가 자신을 고양시켜 나간 과정을 짧게 살피면 이렇다. 추사 김정희는 당대 명문가인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에서 훗날 이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며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하지만 그가 일곱일 때 사도세자의 스승으로 삼정승에 오른 채제공이 추사의 글을 보고 “이 아이는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30쪽)이라 예언했다. 그 말이 후일 적중하자 저자는 추사의 대표 난화인 불이선란(不二禪蘭)에 적힌 자만 가득한 글귀를 들며 그가 학문에 치중하지 않고 예술의 길로 들어선 탓에 파란을 피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422~431쪽).

추사는 평생 넘치는 인복을 누렸는데 박제가를 스승으로 만난 일은 그 출발점이다. 박제가로부터 북학을 배우던 추사는 1809년 생원시에 합격하면서 부친을 따라 대망의 연경 땅을 밟는다. 여기에서 사귄 실학자들과 연경 학자들 특히 스승으로 모시게 된 완원과 옹방강, 친구격인 주학년 등은 추사의 시야를 결정적으로 넓혀 주었다.

60일의 짧은 방문이지만 시서와 금석학 회화에서 청조 최고수를 두루 접한 김정희가 본연의 천재적 재능에 집요한 노력까지 더하니 바야흐로 조선 팔도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1819년에는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하며 부친과 함께 승승장구하였는데 그런 중에 청 학계와 더욱 깊이 교류하여 수많은 문헌과 서화를 섭렵했다.

▲ 추사 김정희의 묵소거사자찬, 秋史金正喜筆默笑居士自讚, 붉은 종이에 먹 32.7x136.4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청조학에 대한 추사의 관심은 대단해서 가령 경학의 총서 황청경해 1408권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쳐 매달린 끝에 기어이 입수했는데 그에게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국내 금석학에 미친 영향도 커서 벗 권돈인을 졸라 산간오지에 파묻힌 황초령 진흥왕비를 찾게 한 일은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이르는 분야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추사는 비평에도 거침이 없었는데, 그가 송나라 소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지론으로 삼은 데서 잘 알 수 있다.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知無不言 言無不盡).”

만년의 추사, 예술과 인격의 합일

이런 소신으로 추사는 당시 조선 서예계를 지배하고 있던 원교 이광사를 평하며 “(그가 진체니 촉체니 하는 것을 표준으로 받든다 하니)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아 가소롭다”고 썼다. 고승 백파의 글을 비평한 ‘백파 망증 15조’에서는 “(고래의) 유불 비유를 일삼으나 무엄하고 기탄없음이 이와 같음을 일찍이 보지 못했노라”며 조소했다.

전주의 이름난 서예가 창암 이삼만이 평을 부탁하자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했고, 친구인 초의선사가 있는 대둔사에서는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내고 자신의 글을 달아두라 했다. 심지어 뒤의 두 일화는 그가 귀양지로 가던 중에 생긴 일이다.

이런 파격이 날로 탁월함을 더한 그의 안목과 더불어 ‘학문과 예술을 완성해가는 모습’(578쪽)일 수는 있으나 그 열정으로 인해 불어 닥칠 후과는 매섭고 끔찍했다. 추사가 안동 김씨 김우명의 모함으로 제주 유배에 오른 일은 애석한 일이었지만, 부족한 관용 탓에 세간에 형성된 악평이 추사의 입지를 좁혔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추사는 1840년 위리안치(귀양 가 집 주위를 가시로 둘러치고 그 안에 사는 것)형을 받아 제주로 유배되어 8년이 지나 풀려나는데, 3년 만에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이듬해인 1852년 해배되니 그의 나이 67세였다. 기나긴 유배 생활이 신체를 지속적으로 갉아 먹어 그로부터 추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겨우 4년 남짓했다.

▲ 추사 김정희가 쓴 서첩, 秋史金正喜先生筆書帖, 지(紙) 26.6x15.5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놀라운 것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유배 과정에서 더욱 성숙되었을 뿐 아니라, 만년에 이르러 심신이 쇠약해진 가운데 그의 작품 세계와 교유 관계가 비약적으로 성숙해졌다는 사실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초의 선사에게 원교의 현판을 복원해 달라 부탁했으며,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백파에게 쏟아낸 비평을 반성했고, 이삼만의 묘비를 찾아 절하고 묘문을 썼다.

저자는 추사가 기울어진 가세로 극도의 궁핍에 시달렸던 마지막 8년간 무수한 작품들을 써냈는데 그 하나하나가 절륜의 경지라고 평한다. 또한 그의 작품들에는 젊은 시절의 자만과 고고연함 대신 원초적인 인간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령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이 자신을 ‘왕따’시키고 저들끼리 노는 모습을 보며 이런 시를 지었다.

눈썹 깔아 소년 섬김 감히 하지 못하니

혼자 남아 어느새 참선객 됐네그려.

동쪽 방의 떠들썩함 어인 일로 저러한가

즐거운 일 눈앞에 가득한 줄 알겠네.

1856년 추사가 죽자 사관이 철종실록에 ‘졸기’를 올렸는데 “(젊어서)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569쪽)고 적었다. 그 자신 칠순에 이른 저자는 이런 평에 만족하지 않고 추사 만년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저자는 대팽고회(大烹高會)라는 추사의 아래 글을 예로 들며 “(이 글은) 추사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글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그렇다”고 적었다.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을 크게 삶아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까지 다 모였네.

저자에 따르면 추사 김정희는 완벽을 추구하는 천재의 면모로 인한 인간적 결함을 끝끝내 넘어섰고, 하여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뛰어난 솜씨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을 터득했다. 덧붙여 저자는 추사가 삶의 전 과정에 걸쳐 도달한 인간적 면모를, 추사의 대표작을 빌어 산숭해심(山崇海深) 즉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말로 요약한다. 일평생 흔들림 없이 오직 해결책을 찾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면모가 그러할 듯싶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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