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이건 뭐 응팔(응답하라 1988)의 아저씨 판이잖아?!

나와 함께 사는 아저씨가 게거품 물고 칭송하는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휴가나온 ‘신삥 아저씨’, 아들과 함께 몰아봤다. 저녁 먹고 시작해 다음 날 아침 5시 반 정도까지 8편을 보고 잠깐 자고 일어나 12편까지 이어봤으니 갑자기 뭔 오덕질인지…

▲ 김미영 칼럼니스트

“인간이 어찌 한 겹 뿐이겠”으며 드라마라는 예술작품이 유일무이의 제작의도만 있겠으며 그걸 본 감상이 어찌 한 가닥뿐이겠나. 나저씨를 둘러싼 저간의 논란은 약간 신경질적이고 단선적으로 보이며 ‘보기나 하고 그러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여지도 있다.

그러나 희희낙락 즐기기만 하는 내 옆의 아저씨와 달리 난 좀 심경이 복잡했다. 쌍문동 골목길에 내 놓은 평상을 대신하여 정희네라는 술집이 등장한다. 고구마 까먹으며 수다 떨던 아줌마들 대신 술 마시며 수다 떠는 아저씨들이 등장한다. 남자들 동네, 아저씨 공동체.

술집 정희네는 토건자본이 대강 훑고 지나간 신산스런 공간 귀퉁이에 자리하지만 카메라가 비추는 전경은 마치 마당 깊은 집 같은 향수어린 풍경이다. 용모로는 평범한 한국인이고 전직으로는 비현실적으로 하나같이 잘 나가던 이들, 현직은 자잘한 자영업자들. 동네 고등학교 선후배이고 동네 조기축구회 종신 멤버들. 그들이 날마다 모여 특기활동을 한다. 술 마시기.

오랜 습성대로 걍 내가 주인공에 동화되어 남성의 시선으로 혹은 젠더 개념 없이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보고 즐길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물든 인간, 여성 젠더. 더없이 즐겁게 저녁과 밤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아저씨들을 보며 와이프와 새끼들은? 이라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스멀스멀 드는 것은 내 의지의 작용이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술 취해 새벽에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정작 문 안 열어주고 내쫓고, 동네 시끄럽게 문 두드리고, 다시는 안 마시겠다 각서 쓰고 지장 찍고, 또 마시고, 울고 불고 사네 안사네 실랑이 하고, 기타 등등의 기억 같은 것. 그 기억이 몸 어디 숨어 있다가 들고 일어나는 소리. 여자들은 어디 갔니?

여자가 있기는 하다. 80년대풍 향수에 꼭 등장하는 ‘만인의 연인’, 마타하리, ‘한국의 로자’(룩셈부르크), 홍일점, 혹은 명예남성, 주모, 정희. 그녀는 상처입은 아름다운 이. (안주를) 양껏 퍼주고 비싼 제철음식을 ‘다라이’ 단위로 마련해 골고루 걷어 먹이며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하려는데 받겠다는 놈이 없어” 외로운 사람.

그 술집엔 술값을 둘러싼 악다구니가 없고 (액수 계산 않고 일인당 얼마씩 투척한다) 술주정과 싸움박질이 없고 (하도 지들끼리 놀아) 새 손님이 없다. 서서히 망해가는 중.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사람들이 모여 살 커다란 집을 선사하는 스타 강사처럼 돈이 많은 것은 아니나, 절로 달아나 중이 된 젊은 날의 남친처럼 돈에 초탈해 그래서 부자인 정희.

▲ tvN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 방송 화면 캡처

각종 부자들이 마련해 ‘주는’ 공동체 터전. 그러나 정희는 정신줄 놓지 않으려 제식훈련하듯 일과를 마감하는데, 그걸 보면 정희는 공동체의 안에 있지 않은 듯.

또 한 여인이 있다. 명예남성 아닌 진짜 여자. 사랑 하나 믿고 자기 가족을 꾸리려 한 남자와 결혼했으나 심리적 이유기를 못 거쳐 아직도 원래 가족을 자기 가족이라 여기는 그 남자 때문에 꿈에 그리는 3~4인 가족을 꾸리는 데 실패한 여자. 결국 자기 가족을 떠나 시집‘온’ 데 불과한 여자.

그래서 온갖 낯선 시월드에 적응하랴 확대 시월드인 정희네 패거리에 적응하랴 인격이 서너개, 시간이 하루 40시간이어야 하는 여자. 돈 벌어 바치고 변호사 엄마라는 버젓한 사회적 지위도 자식에게 마련해줬건만 시어머니에겐 항상 “내 아들보다 잘 나” “미운” 사람일 수밖에 없는 여자.

정작 그 남편이란 사람은 자기 빼놓고 모든 이에게 칭송받는 인격자. 그래서 어따 대고 욕할 수도 없고 자기 고독 자기 좌절감을 이해받을 수도 없게 만드는 이. 개저씨라도 제 마누라 제일로 치고 제 새끼 끔찍하게 여기는 남편이라면 어땠을까? 그녀가 측은하다.

이 드라마는 바람피는 여자, 하필이면 모두의 경멸을 받는 남편 후배와 얽히는 질 나쁜 우연에 휘말린 여자, 환상이 깨진 후 창피해 죽고 싶은 여자, 그녀까지 설득력 있게 그린다. 박해영에게 경배를.

이제 문제적 인간 지안이의 아저씨를 보자. 그는 개저씨만 넘쳐나는 한국에서 희귀종 진짜 아저씨/어른. 할머니께 달을 보여 드리려 동네 마트 카트에 이불 싸 앉혀 언덕배기 콘크리트 계단에서 밀랴 끌랴 애쓴 지안에게 날린 그의 한마디. “착하다.” 그만큼 어른 포지션을 취한 말이 있을까. 그 말을 위악의 인간 지안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할머니를 업고 언덕배기를 오른 그의 ‘행동’이 있었기 때문.

실력은 있지만 재바르게 출세하는 덴 젬병이라 항상 억울한 사람. 남자 동생이 보기에 욕망은 있지만 도덕이 앞서 항상 불쌍해 보이는 사람. 이제 오쟁이진 남편이 되어 진짜 자기를 불쌍해 하는 나르시시스트.

▲ 지난달 11일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아모리스홀에서 열린 tvN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박호산(왼쪽부터), 이지은, 이선균, 송새벽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시스

자기 엄마가 제일 불쌍하고 제일 좋은 아저씨. 지안을 괴롭히는 사채업자를 색출해 그 불쌍한 아이, 자기는 눈물이 나오던데 넌 왜 패냐고 맞짱뜨는 행동주의자. 지안이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년이라 하자 “내 식구 패면 나도 죽여, 다 죽여”라고 내지르는 식구지상주의자. 그는 어른일까?

‘나의 아저씨’의 클라이맥스는 뭘까? 앞으로의 전개는? (왜 결방하고 난리지?) 롤리타 어쩌고 하는 이의 구미에 맞게 둘이 진한 키스를 나누며 어쩌고 할 것 같지는 않다. 설사 아저씨의 시선이 자꾸 지안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지고, “그 춥게 입고 다니는 아이 안 왔냐”고 찾고는 해도. (그 정도의 흔들림이나 떨림도 없다면 이것은 얄팍한 도덕극에 불과하리.)

아니, 나는 클라이맥스를 이미 본 기분이다. 이선균이 지안을 집에 바래다 주는 길에 정희네서 나온 무리와 마주치는 장면. 너댓명 무리에게 지안을 인사 시키고 그의 집을 알려주고 부근에 사는 후배에게 지안을 부탁하고, 지안이 서툴게 생전 처음으로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이로써 지안은, 사고무친 지안은, (전태일에게 노동법을 설명해 줄 대학생 친구가 없던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 할머니 무료 요양병원 갈수 있다고 알려주는 지인 한명 없던 지안은, 동년배 사채업자의 새도매저키즘적 사랑/폭력 앞에 죽기살기로 홀로 맞닥뜨려야 했던 지안은 이제 끈(tie)이 생긴 거다. 빽이 생긴 거다. 그들이 다 버리고 도망가 밀실 속에서 사랑한들 이보다 행복할까.

그의 인정, 존재 인정으로 하여 지안은 자기도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고 조심스레 믿어보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잘 하고 싶다고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의 공동체 그의 동아리에 소개됨으로써 지안은 그 어떤 멤버가 된 것이고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친절한.

저마다 자기가 불쌍한 아저씨와 지안이 맥주 잔 기울이며 실실 웃는다.(지안이 처음으로 웃었다!) 정희네 모이는 이들은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는” 이들이다. 뭐 별로 망가져보이진 않지만 아무튼 주류, 출세, 대기업 등등에서 멀어졌다는 점에서 망가졌다고 치면, 망가져도 끝이 아니라고 거기도 삶이 있고 친구가 있고 즐거움이 있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 tvN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 방송 화면 캡처

인공지능이 발달해 인간이 더 이상 무엇에도 잘날 수 없는 시대, 사람은 이제 잘 나려 애쓰지 않고 잘 난 척 하는 인간들에 치이지 않고 다만 사랑만 하면 되는 시대에 대한, 주눅 들고 못나가는 여배우의 꿈처럼. 청소부와 이류배우의 사랑이 (가능하고) 오래 지속되는, 결혼은 장담 못해도.

출세주의, 성취주의, 능력주의(meritocracy) 대 공동체. 이 드라마는 어린 여자와 나이든 남자의 세대간 사랑이 아니라 저 중심축을 선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저씨들만의 공동체를 삼형제의 우애와 희극의 당의정을 묻혀 파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아내라는 수많은 여자, 가족마저 해체되어 고립무원인 개인들 같이 그 끈끈한 관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을 잘 그리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이 좋은 것이 얼마나 좋으냐 자기만족에 빠져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좋은 것이 무엇을 전제로 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가령 신도시 예쁜 아파트로의 이사, 출세하려 아등바등 살기, 못 나가는 형제와의 꼬리 자르기 등등.

아저씨들의 공동체는 아내 없고 아들 유학 보내 없애고(윽...) 매일 출근하는 직장 없어서 가능하다고 냉소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공동체라는 것이 이성애 결혼의 핵가족이 약속하는 행복보다는 좀 들여다볼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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