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4월에는 대학 동기 월례모임을 수준 높여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갖기로 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리움’(LEEUM)미술관‘. 요즈음 친구 자녀들 혼사가 신정릉역 근처 ‘더 라움’(RAUM)웨딩홀에서 많아 리움, 라움이 헷갈렸으나 강북의 한강진역 근처라 쉽게 찾았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이태원으로 내려가다 하얏트 호텔 쪽 고개를 올라가니 생각보다는 크지 않은 하얀 2층 건물이 단아하게 느껴졌다. 팸플릿을 보니 고미술관, 현대미술관, 삼성아동교육센터 3건물이 함께 이어져 있다.

각기 다른 건축가가 설계했다. 고미술관은 서울 숲과 강남 교보센터도 함께 설계한 마리오 보타라는 건축가 작품인데 벽돌을 많이 사용해 지상 4층, 지하 3층으로 지었다.

오후 3시께라 그런지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나는 2시쯤 가서 먼저 고미술관을 돌았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각 층을 안내하는 여직원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미소로 답한다.

해설은 대학 후배인 박호선 도슨트(docent·전문해설가)가 맡았다. 신정아씨 때문에 미술관에 큐레이터가 있는 줄은 알았는데 전문해설가를 ‘도슨트’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 알았다.

두 쌍의 부부를 포함해 15명의 어른들이 4층의 도자기 전시관부터 단체관람을 하니 몇몇 여성 관람객들이 신기하게 쳐다본다. 간간이 외국인들도 보였다. 중고 교과서에서 봤던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자’ 등 고려청자와 ‘청화백자 매죽문 호’ 등 조선백자의 자태가 우아했다.

박 후배가 “도자기는 중국이 원조이지만 상감법과 청자 비색은 우리만의 특허”라고 다시 확인해 주었다.

▲ 삼성리움미술관/한국관광공사 제공

토기, 도기를 넘어 더욱 높은 온도로 굽는 자기(瓷器)가 한(漢)나라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당(唐), 송(宋)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좋은 도자기들을 선보이면서 진(秦)에서 유래된 ‘차이나(China)’라는 국명이 세계에 알려지게 됐단다. 태토(胎土)가 다른 영국에서 도자기 재료에 소뼈를 갈아 넣어 ‘본 차이나’(Bone China)를 만들었다고 한다.

더 훌륭한 도자기가 고려청자(高麗靑瓷)다. 상감법(象嵌法)이라는 기술과 비색(翡色)의 독특함은 중국 도공들도 만들지 못했다. 자기를 완전히 건조시키기 전에 무늬를 음각해 그 자국에 백토나 적토를 메워 초벌구이한 후 청자유를 발라서 굽는 ‘상감법’이다.

또한 청자의 은은한 푸른빛은 세계 어디서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독특한 색감을 자랑한다. 고려청자의 푸른빛인 ‘비색’은 비취색이지만 ‘신비스러운 색(秘色)’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시대, 높이 46㎝/뉴시스 자료사진

12세기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使高麗圖經)’이라는 견문록에서 “고려 사람들은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비색(翡色)이라고 한다.”고 쓴 데서부터 유래한다.

아직도 비색이 정확히 어떤 색깔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물총새(翡翠)날개의 푸름에 비유한 비취색(翡翠色)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청자가 13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쇠퇴하면서 16세기 이후 제작 비법이 전수되지 않아 그 수수께끼가 밝혀지지 않았단다.

고려청자를 연구한 많은 학자 중에는 비색의 비결이 유약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약에는 철과 이산화규소(SiO2)가 들어 있는데 이들이 결합하여 형성되는 규산제일철(FeSiO2)이 비취색을 낸다는 해석이다.

정선된 태토에다가 나무나 풀을 태운 재를 주원료로 한 장석(長石)이나 석영(石英)의 규산(硅酸) 성분을 혼합한 유약을 입힌다. 이어 불 속에서 1300℃ 이상의 높은 온도로 가열한다. 이때 유약과 태토의 겉이 한데 어우러져 매끄러우면서도 그윽한 비색이 생긴다고 한다.

최근에는 비색의 근원은 유약의 규소가 아니라 산화철에서 기인한다는 새 이론이 나왔다. 도자기를 굽는 불에는 산화염과 환원염이 있는데 산소가 충분해 완전히 연소되는 불은 산화염이라 붉은색을 띈다.

반면에 산소가 부족하면 연료가 덜 타면서 푸른색의 환원염상태가 된다. 땔감이 불완전연소하면서 나오는 일산화탄소가 청자 표면에서 산소를 빼앗아 이산화탄소가 되면서 청자표면이 푸른색의 빛을 낸단다.

이날 또 하나의 논란은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유리를 만들었냐는 것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왕의 고분에서 유리구슬 등이 나왔는데 그것은 그리스, 로마 또는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고미술관 1층에 있는 고려공예와 북교탱화전시관에 작은 파란 사리함이 전시돼 있다. 박 해설사는 우리나라에서 큰 유리그릇이나 유리항아리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리구슬이나 유리함 등은 발견된다는 것이다. 희랍, 로마풍의 화려한 유리공예는 아니어도 유리를 만드는 기술은 충분했다는 설명이다.

유리 제품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리구슬은 철기시대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에서는 많이 나오고 있다. 석영이나 규소를 높은 온도에서 태워 청자의 비색을 낼 정도의 기술이라면 같은 원료를 녹여 유리를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선조들은 유리그릇보다 사기그릇을 좋아했던 것 같다. 유리구슬보다 옥이나 천연석을 선호했듯이. 유리제품은 공예품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네덜란드인에게 유럽의 유리 제조 기술을 배운 일본인들은 17세기부터 기술을 발전시켜 18세기 이후에는 유럽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운 유리제품 들을 만들어냈다.

▲ 박호선 도슨트가 태양계를 표현한 리움미술관 계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은 이삼평, 심수관 같은 도공들을 잡아가 ‘아리마야끼’나 ‘샤쓰마야끼’등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유리 기술에서는 일찍 유리를 제조했던 한국이나 중국보다 앞섰다.현대미술관까지 2시간 반의 미술공부가 별로 지겹지 않았다. 훌륭한 해설사가 선배들에게 질문도 하면서 적당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우리가 잘못 아는 상식을 깨트려 관심을 집중시켰다.

밖으로 나와 기념촬영을 하고 ‘도하 그릴’이라는 양고기가 나오는 카타르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조선시대 각국의 물건이 큰 배를 타고 이곳 한강진에 들어왔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그 언덕 위에서 중동식 빵을 먹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전통문화는 그대로인가?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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