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수십 편의 반짝이는 에세이가 일기처럼 이어진 이 글은 흩어진 일상의 단편이 될 수도, 여행과 산책을 매개로 드러낸 사랑과 이별의 긴 서사가 될 수도 있다.

▲ 김선태 편집위원

작가가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되지만 후자라고 생각하면, ‘너’와 ‘당신’의 차이만큼이나 선명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이유 있는 독서법이라는 생각에 이 책의 문장으로 하나의 서사를 구성하면 이렇다.

# 겨울바람이 전하는 긴긴 생각들

바짝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청거리면 외로움이라는 허기는 더욱 짙게 드리운다. 그러고 보면 따뜻한 음식은 영혼까지도 따뜻하게 데워 준다. 그렇게 떠난 제주도.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를 시키고 책을 읽다, 말다 한다. 여행의 이유, 가만히 있기.

바람의 색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것으로 기억된다. 바람은 차고 혼자라 외롭다. 그리고 외로울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생각한다. 화려한 일을 할 때는 주변에 사람이 들끓었는데 막상 그 일의 옷을 벗으니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쁜 버릇이 생겼다.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마음을 주는 버릇.

유난히 지치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도착한 별 것 없는 문자 한 줄. 그걸 읽는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넓은 세상에 작은 점일 뿐인 내가 초라하지 않은 이유다.

그러다 길을 잃었다. 길을 잃는 순간 여행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런 위안도 떠오른다. 사랑이 의미 있는 이유는 사랑이 꼭 영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고, 때로 사랑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고.

# 상실을 채울 도시의 가을 산책

나와 네가 사는 도시의 밤이 환한 이유? 어쩌면 우리가 매 순간 마주하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누군가의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별이 되고 달이 되어 도시를 비춘다.

▲ 『같이 걸을까』 = 윤정은. 팬덤북스. 260쪽

너를 잃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내게는 오직 너를 잃은 날의 기억만이 생생할 뿐이다. 그게 다행이지 싶었다. 헤어짐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가깝다는 이유로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쉴 새 없이 베는데, 거기에 관심이라는 포장까지 더해지면 상대의 상처는 배가된다. 사랑할 때는 열렬하게 싸우고 성실하게 화해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본다. 여행은 결심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막상 떠날 때보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순간이 더 설레고 즐겁다. 그동안 두 장의 티켓은 서로의 피곤과 슬픔과 우울을 달래 주는 언어가 된다. 둘이 떠나는 여행은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어 참 좋다. 그렇지만 그 어느 시점에 둘은 각자 하나가 되었다.

# 봄날 벚꽃 그리고 일상의 복귀

진정한 슬픔이란 꼭 이런 것이다. 그날은 꽃이 지는 중이었고 아흔아홉을 사신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영화인지 현실인지 커다란 배가 바다에 기울어져 있었고 아직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아이들이 바다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이쪽의 삶과 저쪽의 삶을 결정짓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경계에 서 본 적 없는 이가 감히 그 공포에 대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시간을 흘렀다. 일 년 뒤 우연히 납골당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아이들의 사진과 마주하게 됐다. 숨이 막혔다.

나는 물이다. 당신 미소 한 자락에 내 마음은 평온한 호수, 당신 눈짓 한 번에 내 마음은 풍랑이 이는 바다. 사랑에 빠진 마음은 더 이상 잔잔할 수 없는 물이다. 물결이다.

당신은 공기 속에 있다. 매 순간 곁에 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정말이지 거기 있어 주기만 해면 된다. 더 바라면, 욕심이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돌아온다. 시간도 되돌아왔다. 내가 떠나온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생활이다. 내게는 일상인 곳으로 누군가는 여행을 온다. 어쩌면 우리는 지루한 일상을 낯설게 맞이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지도 모른다.

#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은 없다

바삭바삭. 시간이 지나면 빨래가 마르듯.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 주변에는 참 많다. 우리는 결국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 익숙한 제자리의 기쁨을 되찾기 위해 멀고 먼 길을 돌아오는 게 아닐까.

여행지에서 만난 시장에서 생활용품을 사 오면 그날의 추억도 같이 데려오게 된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러 가는 곳이 아니다. 시장한 마음을 채워 주는 삶의 활기를 사면 물건은 덤으로 딸려 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뜻한 편안함으로 하루의 피로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집. 그에게 그런 따뜻한 집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 다니던 미술관을 이제는 친구와 함께 간다. 여백이 많은 공간이 좋다. 때로 여백이 위로가 될 수 있기에. 미술관으로 간다. 마음의 산책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길 위를, 계절을, 감정을 산책할 여유, 사소함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이야기 한 토막. 소설가 박경리는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을 잃고 이십 년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지인의 권유로 남편이 즐겨 찾던 교외 식당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남편처럼 음식을 달게 먹다 문득 고통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고, 다름 아닌 시간이 자신을 치유해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박경리는, 그 나이까지 살아가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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