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요즘 중고등 친구들이나 대학동기들을 만나면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그냥 놀지 뭐..”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그런 친구 중에서도 거의 등산이나 낚시 등 흔한 취미를 생활처럼 살고 있는 친구들도 있고 좀 여유가 있는 친구는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을 계획해 거의 세계 일주를 하는 친구들은 부러움을 산다.

▲ 남영진 논설고문

가장 놀라운 것은 바쁜 직장생활 뒤에 학교시절 조금씩 해봤던 서예나 그림, 요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정진하고 있는 측이다.

한국일보 출신 선배들 4분이 비슷한 시기에 인사동 가까운 갤러리에서 서예, 그림 출판전시회를 해서 다녀왔다.

60대 70대 80대 선배인 권혁승(84) 윤국병(76) 임철순(64)씨가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가진 ‘언론동행3인전’(言論同行三人展)과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과 프레스센터이사장을 지낸 박래부(66)씨가 인사동 가나 인사아트갤러리에서 연 ‘그리운 날의 풍경’이 그것이다. 박 선배는 50여점의 유화, 판화를 전시하고 같은 이름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했다.

2곳의 개막식 풍경도 비슷했다. 먼저 한 박래부 그림 개막식에는 직장동료 선후배들과 언론개혁운동을 함께 했던 ‘새언론포럼’회원은 물론 중고, 대학 동창들 외에도 은퇴 후 대학에서 언론학을 가르쳤던 제자들도 찾아와 젊은 분위기도 자아냈다.

12월 14일~20일의 '언론 동행 삼인전'엔 한국일보 사우들 40여명을 비롯해 100여명의 지인들이 몰려와 송년모임 분위기였다. 옛 동료들은 축하는 물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주최 측에서 마련한 저녁 술자리까지 모임을 이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언론계 경력이 화려하다. 권혁승 백교효문화선양회 이사장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장·발행인·사장과 한국일보 경제부장·편집국장·상임고문을 지냈다.

윤국병 전 한국일보 사장은 한국일보 정치부장·편집국장·사장, 소년한국일보사장, 코리아타임스 사장 등을 역임했다. 임철순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도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지낸 현역이다. 필자로서 다 한국일보에서 모시던 선배들이라 그들의 은퇴 후 취미생활로 이룬 성취가 놀랍고 부러웠다.

3인 각각 특정 주제와 언론의 덕목과 자세에 관한 글귀 등 각 30여점씩 100점에 가까운 작품들을 내놓아 1,2층 전시실을 꽉 채웠다.

백교(白橋)가 아호인 권 이사장은 주로 효(孝), 여산(餘山) 윤 전 사장은 무욕(無慾)이 두드러지는 삶의 자세, 담연(淡硯) 임 주필은 시(時)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배운 스승들이 달라 서체도 다르다. 권씨는 깔끔한 해서체를, 윤씨는 행서에 가까운 글씨를, 임씨는 변형된 전서체를 주로 썼다. 권, 윤씨는 시계연서회(柴溪硏書會)의 명예회원이며, 임 씨는 겸수회(兼修會)의 정회원이다.

▲ 임철순 주필(왼쪽부터)과 윤국병 전 사장, 권혁승 이사장이 서울 인사동 입구의 붓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한국일보 제공

권 이사장은 언론의 덕목과 자세에 관한 글귀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골랐다. 춘추필법은 공자의 '춘추'처럼 오직 사실에만 입각해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일했던 한국일보 3대 사시(社是)중 불편부당(不偏不黨),정정당당(正正堂堂)과 함께 으뜸이다.

윤 전 사장과 임 주필은 '정언수중'(正言守中)과 '광개언로'(廣開言路)를 썼다. 정언수중은 '바른 말은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며 광개언로는 '언로를 넓게 열어 폭넓게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임 주필의 제의로 전시회가 성사됐다. 임 주필은 이날 함께 온 큰아들과 함께 서예를 배우다가 공부 때문에 포기하자 평소 서예를 하던 두 선배에게 합동 전시회를 하자고 제의했다는 것.

임 주필은 화첩 권두에 ‘붓은 곧 지팡이입니다’라는 제목아래 조선조 중기의 문신 조익(趙翼)의 작품 ‘청죽도’(靑竹圖)를 인용했다. 청죽은 올곧은 대나무의 풋풋한 미덕을 나타내지만 말랐지만 굵은 고죽을 대비시켜 생명의 순환과 자연 질서의 정직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일보라는 한 직장에서 선후배로 활동하던 세 사람은 언론 외길을 걸어왔으나 이제 신문의 붓 외에 서예의 붓 하나를 더 쥐고 살아가고 있다."며 60을 넘어 짚는 새 대지팡이가 삶에 활력을 줄 것이고 "붓을 들고 살아가는 은퇴 언론인의 모습이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의 전시회를 후원했던 스승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선생은 이날 축사에서 “여러 번 은퇴 후 전시회를 보아 왔지만 10년쯤 차이가 나는 같은 직장 선후배가 3인동행전을 갖는 것은 처음”이라며 한국일보의 끈끈한 동료애를 치하했다.

전시회장 앞과 실내,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는 언론계와 지인들의 화환과 화분이 겨울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같은 서예회 동호인들의 축하분도 있었지만 고향도 다 달라 각 고향 출신 학교들의 동기회 화환이 돋보였다.

강원 강릉 출신의 권 사장, 인천 출신의 윤 사장, 충남 공주출신 임 주필의 고교,대학 동창들이 많이 참석했다. 권 사장은 고향 강릉시의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근처에 자신의 땅을 기증해 ‘어머니 길’을 만들어 강릉시로부터 상을 받을 정도로 ‘효(孝)’선양에 열성적이다.

▲ 박래부 작 '공세리 성당'(2016)/한울 제공

박래부 전 이사장은 한국일보 시절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과 ‘한국문학기행’을 함께 쓴 문학기자로 필명을 날렸다.

그는 그림을 접하게 돼 직접 그리기까지의 느낌을 담은 산문집 '그리운 날의 풍경' (한울)이라는 책이 그의 그림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었다. 박 전 이사장은 "여기 전시한 그림은 바닷가, 복숭아밭, 성당과 고궁, 필리핀의 야자나무 등 여러 풍경을 보고 그린 유화"라며 "좋은 풍경이 있는 장소를 찾는 데 애를 썼다"고 말했다.

책에도 첫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 38점을 비롯해 모두 50점의 그림이 담겨있다.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을 만나면서 그림과 가까워졌고, 홍익대 동양화과를 다닌 친형에게 곁눈으로 배워 친구화실에도 다녔고, 대학 때 복학한 뒤 소묘 수업을 도강하기도 했다.

형이 물려준 유화도구를 다루며 그림과의 연을 떼지 못했다. 미술담당 기자 때도 더러 그렸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프레스센터이사장에서 강제 해직된 2008년 11월부터다. 강제 해직의 울분과 무력감을 잊게 해줬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릴 적 풍경이나, 본래의 모습을 잃었지만 그때의 추억을 떠올려주는 풍경을 찾아다녔다. 그의 표현대로 “세상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아버린 자유의 시간이었다.”

추운 겨울 두 곳의 전시회는 후배들에게 은퇴 후의 보람 있는 생활을 설계하는 데 귀감이 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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