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10월의 둘째주 서울의 동서에서는 약 1만년의 시차를 둔 마을축제가 열렸다. 신석기시대를 접할 수 있는 제22회 강동선사문화축제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주둔으로 형성된 용산 이태원의 국제화된 지구촌축제가 그것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

한 도시에서 1만년의 시차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도시는 그리 많지 않다. 유럽의 로마나 중국의 베이징(北京)정도가 아닐까. 한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다양성을 만끽하는 가을 축제다.

13일 금요일부터 사흘간 열린 암사동(바위절) 지역의 선사문화축제는 주변 둔촌중학교 선사고등학교 학생들은 물론 토, 일요일에는 가족단위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저녁에는 암사동은 물론 인근 명일동 천호동 고덕동 지역의 교통이 통제됐다. 근처 서원마을 암사· 명일동 주민들이 토요일 저녁에 동물털로 만든 신석기 분장을 하고 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 분위기가 한껏 올랐다.

올림픽고속도로에서 천호동을 지나 중부고속도로나 구리, 팔당 지역으로 나갈 때 ‘선사문화유적’이라는 움집이 그려진 큰 입간판을 보고 지나쳤던 서울 사람들이 이날에야 그 실체를 볼 수 있었다. 가족 단위는 물론 외국인들도 지난 2014년부터 세계축제협회가 주는 피너클 어워드를 4년 연속 수상한 선사축제의 독창성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축제는 흥겹다. 우선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맛있는 음식도 팔고 클론 구준엽, 이혁, 럼블피쉬의 공연도, 7080 음악과 춤무대도 선보였다. 토요일에 전통줄타기대회와 평양민속예술단공연도 있었다.

인근 동네 주민들이 원시복장을 꾸미고 멧돼지, 호랑이 등 모형 동물들을 몰고 퍼레이드를 한 것은 보는 축제에서 함께 한 참여의 본보기였다. 100여명의 어른들이 참가한 바위절마을 쌍쌍여 호상놀이(무형문화재 10호)는 장례라기보다는 장관이었다.

▲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유적 일대에서 열린 '제22회 강동선사문화축제'에서 주민들이 원시복장을 입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강일동주민센터 홈페이지 캡처

선사시대에는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장례 때는 부족전체가 나와 슬픔을 나누었다.

부족장은 무당이나 제사장을 내세워 망자를 편안히 보내고 장례를 성대히 치러 공동체를 이끌어 갔다. 암사 지역은 한강의 남쪽지역이어서 온조 백제가 여기서 연결된 천호, 풍납동의 풍납토성을 수도로 삼아 번성할 때도 건너편 아차산의 고구려군의 침공을 막기 위한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자연에 널려있던 돌과 나무 등을 그대로 사용하다 이것을 칼이나 도끼처럼 뾰족하게 갈아 사용한 것이 신석기라고 배웠다. 대략 서기전 1만년부터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교차점인 간석기시대가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서기전 1000년 경 문자가 쓰이고 구리와 철의 합금인 청동기의 등장에 이어 철기가 보급되면서 대략 역사시대가 시작됐다. 문자 이전을 선사시대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만강변의 동관진이나 금강변 공주 석장리, 한탄강변 전곡의 구석기유물이 발견됐다. 그러나 구덩주거지(움집) 형태의 신석기 생활터와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화살촉, 생선뼈 낚시 등 많은 유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 암사동의 신석기움집이다. 여기서 조금 상류로 올라가 미사리 강변에도 있고, 그리고 강원도 양양공항 주위에서 발굴된 오산리 유적도 신석기시대의 것이다.

▲ 주민들이 모형 동물들을 몰면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강동구 제공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서기전 5000년경의 양양 오산리 하층, 부산 동삼동 하층과 가장 늦은 서기전 1000년경의 경기도 시도(矢島) 유적까지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약 4000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청동기문화는 신석기문화의 대부분을 그대로 흡수·동화시켜 버렸다. 일부 도서 지방에서만 그 뒤에도 남아 아직도 파푸아 뉴기니의 산악지대엔 신석기 때의 생활이 유지되고 있다.

신석기인들은 물가의 평평한 모래 퇴적지 또는 물가에 가까운 산 경사면에 땅을 파고 들어간 움집에서 생활했다. 주거지가 발굴 조사된 암사동의 경우 4∼5채 정도가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암사동 전시관에는 4~5명 정도의 가족이 한 움집에서 살고 있다. 움집 15~20채 정도가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으로 보아 부족 집단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강에 나가 고기나 조개를 잡고 고덕산, 일자산 등의 낮은 사냥터에서 멧돼지나 고라니, 산토끼 등을 잡아먹고 일부 원시농경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화북 지방의 농경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빗살무늬토기는 1925년 암사동, 1930년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1932년 동북 지역의 유판조개더미(油坂貝塚·유판패총〕등이 나와 한반도 전체의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윤곽이 알려지게 됐다.

▲ 암사동 유적 체험마을에서 어린이들이 선사움집짓기 체험을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V자형의 빗살무늬토기는 외형적으로 봐서는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모양이어서 운반용으로만 쓰였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 궁금증이 풀렸다. 신석기 사람들은 주로 모래나 진흙이 많은 바다나 강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밖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뾰족한 부분을 모래에 꽂아 사용했다. 이후 바닥이 평평한 형태의 무문토기 등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았다. 이 빗살토기는 강동구에서 하남시로 넘어가는 길에 상징표시물로 쓰이고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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