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열 살 남짓한 아이들 여남은 명이 색색의 안전모를 쓰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있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올림픽 쇼트트랙 선수들처럼 입고서 아슬아슬한 기울기로 몸을 기울여 코너링을 한다. 훤칠한 키의 젊은 선생님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 수학이 갑자기 어려워져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초등학교 4학년 이전, 사교육이 예체능에 집중되는 시기, 그 한 현장이구나 싶으면서도 사뭇 기껍고 울컥하기까지 한다.

유럽의 어느 나라였나, 주요 포토존만 요점 정리하는 외국여행 중에 어쩐 일로 그런 한가로운 한 때가 있었을까. 작은 강가에 철퍼덕 앉아 그 동네 아이들이 카누를 타는 것을 바라본 기억.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구명조끼들을 입고 혼자서 카누 한 대를 타고 열심히 노를 저어 간다.

쩔쩔매며 제 자리를 맴도는 아이가 있어 안타까워 하길 잠시 어디선가 선생인 듯한 이가 나타나 방향을 잡아준다.

아이들 방과 후 활동의 스케일이 다르구나. 작은 배 한 척을 제 한 몸으로 감당한 경험이 있는 저 아이들은 얼마나 자신감 있게 인생을 헤쳐 나갈까. 무려 호연지기 무려 리더십.

초저녁의 노을에 물든 여행자의 감상이 별 걸 다 낭만화하는 거? 여하간 이제 우리나라 아이들도 저런 버젓한 신체활동을 하는구나 싶어 울컥한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과 독립문을 이어붙인 넓은 공원은 한 귀퉁이에 이진아 기념도서관을 끼고 있고 한 쪽으로는 안산 둘레길, 다른 한 쪽으로는 비록 큰 길을 하나 건너야 하지만 사직터널 윗 동네와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놀이의 요충지다.

언제까지 자연만 바라보고 때려먹기만 할 건가. 좀 더 내실 있어질 역사관과 도서관이 우리 놀이의 주요 현장이어야 할 터.

유학 갔다 사고사한 딸을 기억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진아 도서관. 장서량은 많지 않아도 창 밖으로 아름드리 나무와 나무에 이는 바람을 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 책 읽는 공간이라서 수험서 놓고 공부하는 이들은 정중히 쫓겨난다.

인구밀도 높은 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좌석 수 늘리기에 골몰하지 않았으니 주말에 가면 자리가 없다는 것이 흠. (사서들이 파업할지 모르지만 연휴에 도서관은 반드시 열어야 한다.)

▲ 시민들이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의 활짝 핀 무궁화꽃길을 걷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안산과 둘레길. 높지 않고 옆으로 넓어 여러 동네에서 올라와 한 두 시간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곳. 북한산이나 관악산 같이 큰 산보다 더 쓰임새(?) 많다. 서대문 구청이 잘 관리하다 못해 주물러 터뜨릴 지경이다.

차례대로 흐드러지게 피는 개나리 철쭉, 벚꽃, 황매화, 아카시꽃, 아름드리 산벚나무, 메타세콰이어 군락, 자작나무 군락 등 아름다운 자연 속에 ‘달빛 아래 댄스’라던가 단풍길 걷기, 숲치유 같은 활동이 많이 이뤄진다. 가히 시민의 보배다.

주변에 긴 연휴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많아 다 그런가보다 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소수파였다. 삼식이 밥 해 댈 걱정에 한숨짓는 아줌마들, 고3마마님이 계셔서 옴치고 뛸 수도 없다는 학부모, 노세노세 젊어 노세 속에 책 안 팔릴 것을 (상당히 신빙성 있게) 걱정하는 출판사 사장님, 항상 ‘노는’ 처지라 연휴라도 꼭히 생활이 변할 리 없는 취준생 등등의 수험생.

무수한 직장인들, 출근 시간 맞춰 아침 단잠 깨지 않아도 되는 것 만도 행복하단다. 아이 유학 보내 놓고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아빠들, 모처럼 긴 연휴가 천행의 기회다.

무려 1200쪽이나 되는 스티븐 핑커 책을 읽어내겠다는 포부를 품게 하는 것도 유달리 긴 연휴의 미덕이다. 남들 놀 때 놀아야 재미있고 분위기 타는 것도 중요하여 평소엔 가기 뻘쭘한 궁궐도 한 번 들여다 보게 된다.

▲ 이진아도서관 앞 마당/뉴시스 자료사진

우리 가족은 설악산 국립공원을 갔는데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진입로에서 기운을 빼고 몇 시간 못 걸었다. 이름난 명승지를 찾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곳에 아름답고 다채로운 문화 공간이 많으면 더 좋겠다.

백두대간에 구멍을 내 어찌나 길던지 추월이 허용되는, 점선이 그어진 터널 만들지 말고 쫌! 대포항 바가지꾼들이 울상을 지어도 할 수 없다. 7년 후 돌아온다는 긴 연휴엔 반경 몇 킬로 안에서 즐겁게 놀 수 있는 인프라와 마인드가 갖추어지기를.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강사를 그만 두고 다양하게 읽고 다니고 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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