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문재인 정부의 경제 브랜드는 소득주도 성장론이다. 임금 인상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 운용 전략을 이해하는 근본 원리다.

▲ 최성범 주필

대기업 감세나 규제 완화, 임금 억제 등을 뼈대로 한 과거 정부의 성장 전략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정책 패러다임이라는 설명이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는 세상” “일자리 만드는 데 쓰이는 세금이 가장 값지다” 등 문 대통령의 발언들은 모두 소득주도 성장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공무원 일자리 늘리기, 통신료 인하, 건강보험 보장 확대, 기초연금 인상 등도 소득주도 성장론의 정책들이다. 앞으로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22%→25%), 소득세 인상, 생활임금제, 상생 임금교섭, 대기업-중소기업의 성과·이익 공유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지수 등이 이 이론적 배경 하에 추진될 정책들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문제 제기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소득불균형과 자산집중현상이 심화돼선 사회가 유지될 수 없는 건 세상의 이치다. 20%를 위해 80%가 희생해야 하는 현실은 대중민주주의가 정착됐고 인터넷의 발달로 직접 민주주의 가능성마저 거론되는 세상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기존의 자본주의에 대해 대공황 직후 수정을 가했듯이 뭔가 보완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게다가 기업중심의 일자리 창출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어 보이니 소득주도 성장론이 공감을 얻는 건 이해가 간다.

소득은 성장의 결과이지 성장의 원천이 아니라는 주류 경제학의 비판에 대해 반격하기엔 소득주도 성장론의 이론적 뿌리가 약하고, 생산성 향상 없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세금주도 성장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성장은 오직 혁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조지프 슘페터의 논리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득주도 성장론을 채택해 성공한 나라가 아직 없고 그리스나 남미는 결과가 나빴다. 그럼에도 소득주도 성장론에 한 번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기존의 경제 모델이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임금주도 성장론’이다. ‘임금’보다 ‘소득’이란 표현이 저항감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경제학의 이론체계로 보자면 일단 케인스학파의 발상을 연상케 한다. 정부의 공공투자를 통해 부족한 유효수요를 메움으로써 소득을 증대시키겠다는 케인스이론과는 달리 임금 증대를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한다는 게 차이가 있긴 해도 유효수요를 창출해서 경기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근본 원리는 비슷하다.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 점에서 ‘포스트 케인지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차이가 크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장과 기업에 대한 신뢰의 차이다. 시장만능주의나 다름 없는 신고전학파는 말할 것도 없고 케인스주의도 기본적으로 시장을 믿는다.

반면 소득주도성장론은 시장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게 특징이다. 어떤 면에선 시장 자체를 부인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기존의 자본주의가 결함이 있다는 반성이 일면서 대안 모델로 각광을 받았다. 대기업 중시의 낙수효과를 신봉한 주류 경제학에 비해 소득증대가 분수처럼 올라가 성장을 이끈다는 ‘분수론’을 내세운다.

▲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브랜드는 더 이상 기업이 경제정책의 동반자가 아닌 경제운용 전략이다. 이같은 경제운용 전략은 재벌개혁이 아닌 재벌때리기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초청 오찬 및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기존의 경제이론이나 정책들이 기존 시장경제의 실패를 보완하거나 수정하는 선이었다면 소득주도 성장은 시장이나 기업 자체를 믿지 않는다. 시장은 반드시 실패하며 정부가 지속적, 제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장이나 기업을 불신한다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결국 그 얘기다.

한마디로 기업이 경제정책의 동반자가 더 이상 아니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는 얘기는 소득주도 성장론자들에겐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시장과 기업에 대해 그러할진대 재벌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동반자는커녕 소득주도 성장의 주역이 돼야 할 중소기업을 핍박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여긴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재벌개혁' 아닌 ‘재벌때리기’ 사회적 분위기 조성할 우려 피해야

이 시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외견상 이번 판결과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기업이 더 이상 성장의 주역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소득주도 정책이 본격 시작된 현실을 감안하면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니다.

정부와 여당의 이같은 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재벌때리기라는 카타르시스적인 분위기도 감지되는 게 사실이다.

국민의 감정상으론 재벌개혁은 재벌 때리기와 구분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재벌정책이 매우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는 점과는 무관하다.

재벌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재벌개혁이 재벌 때리기로 변질될 수도 있는 사회적 분위기는 다소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인기가 있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차분하게 재벌개혁의 틀을 다져 나갈 때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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