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없어야 하는 존재”라니

김용자 수필가l승인2017.06.21l수정2017.06.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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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여섯 살 재형이와의 일이다.

에미는 아직 강의에 땀을 흘릴 오후 두어 시경, 재형이가 노란 유치원 가방을 마루에 집어 던지면서 왕왕 울어댔다.

늘 명랑한 아이가 “할머니, 제가 이 세상에서 없어야 하는 존재예요”라고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작은 입에 담기로는 말 자체가 무척 컸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보았다.

“재형아,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무슨 말이니”

“할머니, 제 짝꿍 피터가 절 보고 넌 세상에서 없어야 하는 존재라고 했어요”

▲ 설 명절을 앞둔 지난 1월 24일 대전중구평생학습관에서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전통 예절을 배우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여섯 살의 재형이 입에서 나오는 ‘존재’라는 말에 아연했다. 순간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로 우리 재형이의 마음을 달래 줄까.

나는 재형이를 가슴에 먼저 꼭 껴안아 주었다. 한참 재형이는 나의 목을 끌어안고 두 다리를 내 허리에 깍지 끼듯 하고 흐느꼈다. 그대로 수 분이 흘렀다.

아직도 흐느끼는 재형이를 조용히 내려 무릎 앞에 앉히고 야리고 고운 두 손을 꼭 잡은 후, 내 눈을 마주 보게 했다. 이렇게 곱고 순수한 나의 손자 재형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런 생각이 나의 분노를 자아냈다.

“재형아, 할머니 말 잘 들어야 해. 우리 재형이가 없다면 해도 달도 별도 없어.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없어. 세상이 없어지는 거야.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아이야. 온 세상이 너 하나 때문에 있는 거야. 알겠니”

똘망한 눈으로 할머니의 말을 열심히 듣던 재형이가 내 무릎에서 좀 떨어져 앉더니 “휴!, 이제 살겠다”, 그리고는 어린 아이답잖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들끼리의 싸움은 애비 두 형제를 키우면서 많이 경험했기에 크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섯 살 재형이 입에서‘ 존재’ 같은 어려운 말이 나왔으니 그대로 두어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터는 재형이와 얼마 전에 새로 짝꿍이 되었는데 집에 와서 가끔 피터의 이야기를 화가 나서 하긴 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는 재형이와의 일을 그대로 아주 상세하게 말했다. 피터 어머니가 알아야 할 문제라는 말도 했다.

다음 날은 마침 강의가 비었기에 에미가 재형이를 유치원에 데리고 가는 날이었다. 선생님과 피터 어머니를 불러서 그동안의 경위를 이야기하게 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말조심하겠습니다. 피터에게 제가 별 뜻 없이 자주 한 말이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말의 강도를 최고로 높여서 써야 상대를 제압(制壓)할 수가 있다고 떠드는 사회 속에 방치되어 살고 있다. 어른도 아이도 그런 속에서 병이 들어가고 있다.

집에서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하지만 문 밖에만 나서면 막말이 남무하고, 무균 상태의 수많은 재형이가 걷잡을 수 없이 오염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언어의 최고 장점은 발달된 존칭 세분화를 꼽았으며, 이런 우리 언어의 섬세함을 세계 언어학회에서 특장으로 꼽았던 일이 있다. 그 아름다운 말이 오염되어 중병을 앓으며 죽어가고 있다.

여섯 살짜리 피터의 어머니가 함부로 쓰는 그 끔찍스런 말들이 비단 그들만이 쓰는 말이 아님을 어쩌랴. 아이의 인격을 생각 않는 무신경한 많은 한국의 젊은 피터의 어머니들.

어미의 말 한 마디가 자식에게 염원과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에게도 반성이 되어 왔다.

 
김용자 수필가  webmaster@econo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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