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의 정치 시평

[이코노뉴스=김홍국 편집위원] 정치의 요체는 책임이다. 자신에게 투표해준 국민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정치활동을 하며, 정치적이고 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정치인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숙명이다.

▲ 김홍국 편집위원

정치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탄핵을 당하거나 퇴진을 당하고, 법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퇴임후 민·형사상 소추를 당하게 된다.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독재자나 무능인물, 부정부패 또는 국가기밀 누설 등의 역사적 오명을 안게 된다.

닉슨과 이승만…하야·탄핵의 역사적 사례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고 극적인 사례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도청한 사실이 <워싱턴 포스트>에 폭로되자, 닉슨은 수사 방해와 거짓말, 협박 등으로 위기를 돌파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닉슨과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은 언론의 집요한 추적보도에 이어 하원이 탄핵 절차에 착수하자 2년여 만에 사임했다.

브라질의 페르난두 콜로르 지멜루 대통령은 1990년 대규모 부정축재 혐의가 드러났고, 1992년 10월 하원 탄핵에 이어 12월 상원이 탄핵 절차를 진행하자 사임했다. 상원은 탄핵 소추를 계속 진행해 탄핵안을 가결했다.

올해 8월에는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가 2014년 대선 당시 국영은행 자금을 재정적자 축소에 전용한 회계부정 혐의로 탄핵당했다.

1997년 2월 에콰도르의 압달라 부카람 대통령은 취임 6개월 만에 공금횡령·부패·무능 혐의와 정실인사, 저급한 기행 등으로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불렀고, 의회에서 “정신적·육체적으로 통치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일본계인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은 1990년 당선 이후 10년간 부패, 반대세력 탄압, 선거조작, 친위 쿠데타, 원주민 학살 등 폭압을 일삼다가 2000년 의회가 탄핵 소추를 진행하자 일본으로 도주했다. 2005년 정계 복귀를 위해 칠레로 갔다가 체포돼 2007년 페루로 강제송환됐으며, 2010년에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 전국교수연구자비상시국회의가 5일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행진을 하고 있다./뉴시스

필리핀에선 2000년 7월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당선 2년 만에 뇌물 혐의 등으로 탄핵 심판에 오르자 사임했다. 2001년엔 인도네시아의 압두라만 와힛 대통령이 이 나라 최초의 민주선거로 집권한 지 2년 만에 조달청 공금횡령 사건에 연루돼, 의회가 만장일치로 탄핵을 가결했다.

리투아니아의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은 2003년 1월 대선 당시 마피아가 연루된 불법 선거자금 수수에 이어, 재임 중 국가기밀 누설과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2004년 4월 의회에서 탄핵당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례가 극적이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통령에 재임했던 그는 1960년 3.15부정 선거로 4·19혁명이 일자 4월 27일 중대성명을 통해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하야한 뒤 망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공무원을 동원한 선거운동, 선거인명부 허위기재, 위조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부패와 범죄를 자행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4.19혁명은 서울 시내 대학생, 중·고교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오며 시작됐고,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 '경무대'까지 접근했다. 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자, 서울에서만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자 100여 명이 발생했고 폭력진압에 의한 희생자는 전국 186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살인정권 타도'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등 대량 인명 피해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들이 하야 요구 선언문을 발표하며 거리로 나오자, 장면 부통령이 25일 사퇴한 데 이어 이 전 대통령은 다음 날인 26일 장기집권 12년을 끝으로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광장 나선 수백만 촛불 ‘활활’, 법적·정치적·역사적 책임져야

지난 3일 열린 6차 촛불집회에는 주최측 추산으로 232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집결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석한 집회다.

지난 10월 29일 2만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가 1987년 6월항쟁을 뛰어넘는 백만명 규모로 커졌고, 6차 집회에는 박 대통령의 변명과 독선으로 일관한 3차 담화에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됐다.

이와 함께 평화와 질서를 지키면서 수준높은 성숙한 민주의식이 빛나는 축제의 현장을 만들면서 대통령과 정치권을 질타하는 한국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전 세계가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치권은 이같은 국민들의 염원에 화답해야 한다. 집권 여당으로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방조하고 권력을 함께 향유해온 새누리당은 뼈에 사무치는 반성과 함께 탄핵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청와대와 이를 옹호해온 새누리당의 정략적인 출구 모색에 분노한 민심은 날로 격화되고 있다. 집회에 나선 시민들은 새누리당을 향해 즉각 해체를 요구했고, 새누리당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계란세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정치를 왜곡하고 저질화 시키며 사실상 공범으로 함께 해온 친박 세력들은 국회의원 직을 사퇴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한국정치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주류 진영 역시 탄핵에 동참해 그동안 박 대통령의 무한질주를 방조하고 함께 해온 과오를 갚아야 할 것이다.

▲ 2009년 7월 20일 페루 대법원의 세자르 산 마르틴(가운데) 대법관이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전 대통령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 대법원은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공금횡령 혐의를 인정, 징역 7년6개월 형을 선고했다./[리마=신화통신/뉴시스 자료사진]

야당 역시 국민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야당은 횃불로 타오르는 민심을 제대로 읽고 대의기관인 국회를 대표해 현 시국을 수습하는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할 것이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는 막중한 범죄를 저지른 박 대통령이 임기를 몇달 단축해 퇴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수백만명 국민들이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는 엄중한 민심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정치권에 대해 준엄한 책임과 역사적 과업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퇴진과 탄핵’ 조속히 용단하고, 대한민국 새 미래 열어야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국가의 헌법과 법률을 어겼을 때는 죄를 달게 받는 법적,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

동양의 성현인 맹자(孟子)는 ‘양혜왕편’(梁惠王篇)에서 지도자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강조한다.

맹자는 제선왕(齊宣王)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왕의 신하가, 그의 처자를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로 놀러갔다 돌아와 보니 그 친구가 처자를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왕께서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고 맡긴 처자를 굶주리게 한 그런 친구라면 당장 절교를 해야 합니다.”, “사사(士師·법무장관)가 그 부하를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그만두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경(四境·나라) 안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이야기를 하다.

▲ 3일 대구 중구 동성로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5차 시국대회' 참가 시민들이 새누리당 대구경북시당으로 이동해 새누리당 해체를 요구하는 내용의 간판을 새롭게 붙이고 있다./뉴시스

맹자는 왕이 딴전을 피우며 회피한 것(顧左右而言他·고좌우이언타)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민심을 섬기지 못하는 지도자에 대해 역성혁명까지도 용인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매 주말마다 촛불집회에 나선 수백만 시민들과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탄핵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평등, 정치의 비효율과 무능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법적,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지고 퇴진의 용단을 내려야하고, 국회는 법적 절차에 따라 탄핵에 나서야 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사법처리와 함께 낡아버린 87년 헌법체제를 개혁해 도전 가득한 시대인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헌법과 정치체제를 만들어내는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고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 김홍국 편집위원은 문화일보 사회부·경제부 기자, 교통방송(TBS) 보도국장을 지냈으며, 경기대 겸임교수(정치학)로 YTN 등 보도 및 종편 TV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문 패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