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의 정치 시평

[이코노뉴스=김홍국 편집위원]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흑인들을 포함한 20여만명의 미국 시민들이 평화행진을 하며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 속속 집결했다.

▲ 김홍국 편집위원

매혹적인 목소리로 인권의 가치와 시민들의 결의를 담은 노래로 감동을 준 가수 존 바에즈를 비롯한 예술가들도 전면에 포진했다.

흑인 민권운동의 리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이 시작됐다. 비폭력 투쟁을 근간으로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킹 목사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은 이 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역사적 연설로 절정을 이루었다.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라며 인종 차별 철폐에 대한 진실한 소망을 호소력 있게 표현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어 워싱턴 시내를 평화행진하는 시민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시민들의 환호는 온 미국땅을 뒤덮었다.

이날 킹 목사를 만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고용차별정책의 폐지를 약속했다. 실제로 1년 뒤인 1964년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과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됐고, 2008년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미국대통령이 되는 등 인류의 인권운동은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이로부터 24년만인 1987년 6월 10일 서울시청 앞 광장. 군사독재로 민주주의를 탄압해온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護憲) 입장 발표에 분노한 백만 시민들이 집결했다. 워싱턴 시위의 5배가 넘는 엄청난 시민들이 결집해 민주화 열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후임 대통령을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으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특별선언이었다.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어 경찰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시위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지면서,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할을 했고,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 최순실 게이트 특별수사본부 이영렬 본부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전광판에 생중계 되고 있는 가운데 뒤로 청와대가 보이고 있다./뉴시스

2주 연속 백만 촛불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평화롭게 마무리

워싱턴 시위가 일어난 지 53년 만에, 87년 6월 민주항쟁 29년만인 지난 19일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 공식 집회가 100만 시민들이 피운 거대한 촛불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타올랐다. 서울에서는 60만명, 부산(10만명), 광주(5만명), 대전(3만명), 대구(2만명) 등 전국 각지에서도 촛불집회가 진행됐다.

2주 연속 이어진 백만 촛불의 시민집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민심을 표상하며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대장정이 시작된 셈이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국인들의 열정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말을 바꿔가며 검찰 조사를 거부했고, 20일 발표된 검찰의 수사 발표에 대해서도 거세게 반발하며 “탄핵하라”고 역공에 나서고 있다.

검찰은 이날 최순실-안종범-정호성 3인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 발표에서 “특별수사본부는 대통령에 대해 현재까지 확보된 제반 증거자료를 근거로 피고인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의 범죄사실과 관련해 상당 부분이 공모관계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그러나 헌법 제84조에 규정된 현직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때문에 기소할 수 없다”며 “특별수사본부는 위와 같은 판단에 따라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하겠다”고 설명했다.

즉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등과 범죄를 공모했다는 공식 발표로, 박 대통령은 헌정사상 최초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 신분의 현역 대통령이 되면서 국민과 야당들의 거센 하야를 포함한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20일 오후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관련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뉴시스

이에 대해 측근인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는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해 국민들의 분노를 샀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는 박탈당한 채 부당한 정치적 공세에 노출되고 인격 살인에 가까운 유죄의 단정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분노 속에서도 시민들은 질서정연하게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19일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지난 12일 촛불집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평화적 분위기를 유지했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과 내자교차로에서 낮 1시쯤부터 자정까지 이어진 4차 집회는 주최 쪽 추산 60만명(경찰 추산 18만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음에도 경찰 부상자와 시민 연행자 모두 발생하지 않은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과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은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의 품위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검찰 피의자인 박 대통령이 지난주 검찰에 ‘엘시티 비리 의혹’ 엄정수사를 지시하는 등 국정 주도권을 되찾으려 ‘반격’하며 슬며시 국정에 복귀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모습에도 시민들은 질서정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보수단체들이 일당을 주고 노인을 동원하는 등 의도적인 ‘맞불 집회’를 열어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을 욕설하고 취재진을 폭행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매번 평화적으로 집회를 이끌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준 높은 민주주의 의식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AFP>는 1980년대 민주화 항쟁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고, <BBC>는 박 대통령이 두 차례 TV 방송을 통해 사과했지만 사퇴 요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촛불집회 소식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촛불은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꺼지지 않을 것이며 촛불집회가 박 대통령이 퇴진하거나 탄핵당하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집회에 수능 시험을 마친 학생들도 가세했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부정 입학한 데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AP>는 “이번 집회에 록 음악 공연, 공개발언, 박 터뜨리기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 가족 단위로 즐기기 좋은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고, <AFP>는 “세계에서 스마트폰 보급률이 가장 높은 국가인 한국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스마트폰에 원하는 색의 촛불을 화면에 띄울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촛불 시위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가 부정부패와 국기문란을 저지른 대통령을 비판하는 한편 한국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수준높은 시민의식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제3차 대구 시국 대회가 19일 저녁 대구 중구 대중교통 전용지구에서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뉴시스

정치권, 대통령 퇴진-탄핵을 이끌 현명한 정치력을 보여야

이제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정치권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으로서 범죄 피의자가 된 박 대통령 문제를 국민의 뜻을 받들어 현명하게 처리해야 한다. 일단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진실하게 피의자로서 범죄 혐의에 대해 고백하고 법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탄핵 절차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정치적 공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버티기로 일관하는 방식은 국민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과 대통령의 범법에 따른 국기문란 행위로 국격을 실추하고, 헌정을 능욕한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권의 총리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대선 국면을 관리하고 파괴된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한 과도내각에 국정을 맡기고 물러나야 하며, 국회가 법적 정치적 책임을 다하도록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2주 연속 백만 촛불이 켜진데 이어 26일에는 그 이상의 분노를 담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오기로 예정된 상황에서 국민들의 분노를 키워서는 안된다. 여당과 야당은 가능한 국정 마비나 차질이 없도록 대통령의 퇴진 및 탄핵 절차를 진행하면서, 국민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민주와 정의’라는 가치를 담고 퇴행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도록 온 국민이 손에 손잡고 민주주의 수호에 나서야 할 것이다.

※ 김홍국 편집위원은 문화일보 사회부·경제부 기자, 교통방송(TBS) 보도국장을 지냈으며, 경기대 겸임교수(정치학)로 YTN 등 보도 및 종편 TV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문 패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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