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의 정치 시평

[이코노뉴스=김홍국 편집위원]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씨의 ‘국정(國政) 농단(籠斷)’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대통령의 외교·안보 분야를 포함한 국정 각 분야에 대한 연설문이 사전에 빠져나가 최씨에 의해 수정되고, 국무회의 내용과 장관 인사 등 국정 현안이 최씨의 손에 의해 농락당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동원해 기업들에게 강제 모금한 800억원대의 자금이 유용되거나, 자신의 딸을 돌보는 데 사용됐고, 대학의 입시와 학사 부정에도 개입했다.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이다.

▲ 김홍국 편집위원

‘국정 농단’은 망국으로 연결…초유의 국기문란 사건

‘농단’은 ‘언덕 롱’(籠)자와 ‘끊을 단’(斷)자로 구성된 한자성어로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으로, 재물을 독차지하는 횡포’를 의미한다. 이 성어는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 맹자의 말을 통해 전해졌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농단’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연유를 선왕에게 설명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卑劣)한 수법을 증오(憎惡)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맹자의 ‘공손추장구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실제 이같은 국정 농단은 역사 곳곳에 나타났다. 북제의 간신 화사개가 대표적이다. 그는 문선제에게 "인생은 짧습니다. 그 짧은 세월동안 군사니 정치니 골치 아픈 일들을 따져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저 열심히 즐기고 노십시오. 그러기에도 인생은 모자랍니다."라고 향락을 권유했다.

이렇게 문선제와 태자 후주를 방탕과 환락으로 내몰고 자신이 정권을 잡아 국정을 운영했다. 결국 화사개는 태후의 신임을 받던 고엄과 풍자종에게 살해당했고, 내분에 휩싸인 북제는 비참하게 망국의 길을 걸어야 했다.

▲ 올 가을들어 최저 기온을 기록한 1일 서울 여의도역 인근에서 시민들이 두툼한 옷을 입고 '최순실 게이트' 규탄 플랜카드 앞을 지나가고 있다./뉴시스

송나라의 휘종에게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게 했던 간신 채경 역시 대표적인 국정 농단의 사례다. 채경도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지 말고 맘껏 쾌락을 즐기라"고 황제를 유혹하고 자신은 재상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다.

채경이 권력을 잡은 이유는 자신이 권력과 부를 즐기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예술애호가였던 휘종의 눈에 들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진귀한 예술품을 강탈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송은 금나라에게 짓밟히는 치욕을 당했고, 채경 역시 죽음으로 내몰리는 비극으로 삶을 마쳐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선실세들의 호가호위는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독약과 같은 악역을 했던 것이다.

최순실-박 대통령 조사 통해 사건 실체 규명-처벌해야

현대판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다. 이 사태를 불러온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지난달 30일 귀국한 뒤 검찰조사를 받고 긴급 체포됐다. 최씨는 검찰 출두 과정에서 “국민 여러분 용서해달라. 죄송하다. 죽을 죄를 지었다”며 사과했다.

그러나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국정을 농단한 최씨를 용서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환으로 사건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최씨는 사건이 공개되기 시작하자마자 각종 기록을 파기하고 독일로 해외 도피하는 등 증거인멸 우려가 제기된 데 이어, 예상을 깬 갑작스러운 귀국과 검찰 출석은 물론 관련자들의 발 빠른 움직임이 짜맞추기 시나리오라는 의심을 자아내고 있다. 최씨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엄정한 처벌이 필요한 이유다.

더불어 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 역시 불가피한 상황이다. 미르·K스포츠 재단의 설립·운영과 청와대 문서 유출 사건의 몸통이 최씨라지만, 더 큰 몸통은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기까지 기업들과 소통하면서 논의 과정을 거쳤다. 지난해 2월 기업인들에게 문화·체육 투자 확대를 부탁드린 바 있고….”(10월 20일 수석비서관회의)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최씨로부터)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좀더 꼼꼼하게 챙겨보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10월25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라고 상황을 밝혔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기업에 문화·체육에 대한 투자 확대를 부탁한 사실을 밝혔고, 최씨가 두 재단 운영 상황을 대통령에게 수시로 보고했다는 관련자 진술도 나온 것 역시 이를 입증한다. 박 대통령이 이미 자신의 관여 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형사상 소추는 퇴임 후로 미루더라도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미룰 수 없는 이유다.

▲ 흔들리는 청와대. D4 저속셔터 촬영./뉴시스

최씨의 행위가 대통령기록물법, 군사기밀보호법, 횡령배임, 공갈협박, 업무방해, 뇌물공여 등 범죄라면, 박 대통령 역시 범죄의 공범일 가능성이 크며 뇌물·직권남용죄에도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이 헌정 질서를 유린해 ‘국기 문란’의 죄를 저지른 점이다. 헌법은 정부의 대내외 정책과 인사 등 중요 국정에 대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대통령의 자문기관으로 분야별로 국가원로자문회의 등을 따로 명시하고 있다.

모든 국정 행위는 헌법과 법률 안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국민의 권한 위임을 받은 대통령이 헌정 질서를 허문 것은 국기를 뒤흔든 중대한 범죄다.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동안 국정감사 등에서 최씨를 두둔하고 조사를 막아온 청와대와 집권여당이 대통령 보호를 목적으로 압수수색을 거부하고 은폐·축소를 꾀하는 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검찰은 최씨에 대한 조사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포함한 어느 누구라도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한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거부한 청와대가 최씨를 내세워 적당한 선에서 꼬리자르기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지적을 직시하고, 철저하고 엄정한 수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최순실씨에 대한 연설문 유출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한탄했고,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목민관의 본무며 선의 근원이고 덕의 바탕이다. 청렴하지 못한 자는 목민관이 될 자격이 없다. 위정자가 국민을 통솔하는 방법에는 위정자의 위엄과 신의가 있어야 국민이 따르게 된다. 정치인의 위엄은 청렴에서 생긴다. 자신부터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지도자의 자세를 지적했다.

이미 대통령의 국정 리더십은 붕괴됐지만, 대한민국의 국정과 국민을 위한 정부의 업무는 더욱 투명하고 진실하게 진행돼야 한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에 대한 철저하고 엄정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정치권의 지혜로운 해법 모색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 김홍국 편집위원은 문화일보 사회부·경제부 기자, 교통방송(TBS) 보도국장을 지냈으며, 경기대 겸임교수(정치학)로 YTN 등 보도 및 종편 TV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문 패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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