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의 정치시평

[이코노뉴스=김홍국 편집위원] 광복절이 올해로 71주년을 맞는다. 필자뿐 아니라 온 국민이 광복절을 맞아 집 창문에 게양할 태극기를 준비하면서 광복절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진 자부심과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채 침략자인 일본군과 친일파 아래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우리 조국을 찾게 된 기쁨, 광복절은 아무리 즐거워해도 지나치지 않을 환희의 경축일이다.

▲ 김홍국 편집위원

71년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돼 한국이 독립한 것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다. '빛을 되찾다'는 뜻의 광복은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하며, 광복절은 우리 국민들이 회복한 자주성과 독립성을 빛내는 날인 것이다.

험난한 여정에서 이끌어낸 광복, 아직도 갈 길 멀어

우리 한민족에게 광복의 역사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합방하고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숱한 수탈과 학정을 반복하며 약탈자이자 침략자로서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등 극악한 침략 행보를 보인 군국주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는 시대에 따라 다소 정책의 변동을 보였으나, 이 기간 일관된 정책은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 말살 및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로 일관했다.

1945년 35년에 걸친 식민지의 질곡에서 해방되었으나 그 동안에 이루어진 식민지 경제의 파행성과 왜곡된 근대화로 인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아직까지 겪고 있다.

또 일제가 물러간 한반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확정된 38도선은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낳았고,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민족간에 총부리를 겨누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8·15 광복절의 의미는 광복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된다. 국권 상실 직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협의를 거쳐 세워진 서간도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1936년의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 1940년 임시정부가 재조직한 광복군(光復軍) 등을 통해 광복은 우리 국민의 꿈으로 피어났다.

▲ 광복절인 15일 정오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광복 71주년행사에서 박원순 시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독립유공자 후손과 올해의 타종 인사들이 타종을 마치고 만세를 하고 있다./뉴시스

광복군은 1940년 임시정부 산하에 창설됐고, <광복>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가 1941년에 창간한 광복군의 기관지로서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광복의 희망을 제시했다.

광복절 기념 행사는 여러 곡절을 거쳐 1970년부터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로 격상됐다. 그러나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 암살 사건이 북한 간첩에 의해 발생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 시작했다.

다행히 광복절 기념식은 중앙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독립기념관 등으로 장소를 바꿔 열리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오랜 군사 독재정권 이후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 대통령은 일제 지배를 상징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국민 여론을 감안해 1995년 8월 15일 이를 철거하는 광복정신과 역사 살리기에 나섰다.

일본인에게 이날은 패전일 또는 종전일이지만,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시달린 한국과 중국, 필리핀, 태국 등 여러 민족들에게는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준 경축일이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피해 국가들이 주춤하는 사이 패전 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탄탄한 국력을 바탕으로 지역의 맹주 역할을 자임하며 제국주의 국가의 속성을 다시 드러내고 있고, 동아시아는 미국과 일본이 맺은 미일동맹의 틀 안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평화헌법을 부정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극우 아베 정부는 전쟁이 가능한 소위 보통국가를 지향하며 교전권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헌법 9조를 개정하는 개헌을 공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전쟁 가능 국가로 돌아갈 경우 우리나라와 중국 등 인근 국가들과 군사적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동아시아 역내의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피해자 중심 위안부 합의, 통일 지향 남북관계는 역사적 책무

과연 21세기를 맞은 지금 한국인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가장 피부에 다가오는 비극적 사례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건이다.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와 졸속 결정한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며, 정부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보장받고 국가로부터 외교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할머니들의 권리를 외면하고 포기하는 외교적 대참사이다.

당사자들이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전에 협의나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팽창주의 성향을 보이는 극우 일본 정부와 단돈 10억엔에 떡하니 ‘12·28 합의’를 이루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지난 25년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사죄를 요구하며 1992년부터 1243차례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 시위’를 열고 국민모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해온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를 배제한 합의가 무슨 소용인가?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모임 평화나비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12·28 한일 합의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일본은 한·일 합의에서 피해자들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일본 정부의 위안소 설치·운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군의 관여’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데, 양국간 합의가 무슨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는가?

불합리한 엉터리 합의를 강요하면서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지원예산은 사라졌고 초등학교 6학년 국정 사회교과서에서는 실험본에 있었던 ‘위안부’ 용어와 사진이 빠지는 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미일동맹을 상부구조로 둔 채 미·일·한 삼각구도에 빠져 지역 군비경쟁에 빠져들고, 자주국가로서 작전권도 갖지 못한 채 국가정책이 미국과 일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오늘의 외교책략은 대체 무엇을 지향하는가?

진정으로 친일파를 배제하고 친일문화를 배격하면서 역사에 사죄하는 일본과 진실한 친구가 될 때, 그럼으로써 대한민국이 지켜온 민주주의와 인본사상을 세상에 드높일 때 민주화와 통일은 완성된 형태로 다가올 것이고, 광복절은 국민의 가슴을 울리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남북간의 통일 논의는 버려둔 채 북측의 굴복과 패망을 강요하는 대북 압박 흡수통일 정책으로 냉전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외교력은 상실된 채 통일의 꿈 역시 사라진 상황에서 광복절은 허망한 미망일 뿐이다.

자주독립과 통일한국을 꿈꾸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해온 선조들을 뵐 낯이 없는 지정학적 상황은 악화일로다. 언제쯤에나 광복절에 친일파를 단죄하고,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외치며 광복과 해방, 민족통일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 김홍국 편집위원은 문화일보 사회부·경제부 기자, 교통방송(TBS) 보도국장을 지냈으며, 경기대 겸임교수(정치학)로 YTN 등 보도 및 종편 TV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문 패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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