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경제신간 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상상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면접 질문을 다룬 존 판던의 ‘옥스브리지 생각의 힘’은 전작 ‘이것은 질문입니까?’ 못지않게 기상천외한 질문을 담고 있다.

▲ 김선태 편집위원

그런데 끈기 있는 독자라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나 성서의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이 질문을 놓고 저자의 기발한 답변과 한 판 씨름을 펼칠 필요가 있다.

전작의 인기가 증명하듯 저자는 여기서도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질문에 대한 분석이 한층 신중하고 다채로워 졌다는 느낌이 든다. 전작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구멍을 뚫고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바보 같은 답변을 했다는 고백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방법은 무엇?”

당시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전제해야 한다며 지구에 구멍을 뚫은 뒤, 인간 역시 초인이라 가정하고 뛰어내리게 했는데, 이상하게도 중력이나 관성과 같은 물리법칙은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상상력도 부족하고 앞뒤도 맞지 않는 답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한층 다각도로 질문을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단서를 제공해 독자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이 가방을 완전히 비울 수 있을까요?”라는 이공계 질문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물리법칙에 매몰되는 대신 ‘비우다’라는 말의 다의성을 캐묻고, ‘진공’이라는 말을 연구하며, ‘텅 빔’의 사상적 연원을 파헤치더니, “무로부터 나올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셰익스피어의 명언까지 찾아낸다.

▲ 『옥스브리지 생각의 힘』 = 존 판던. 알에이치코리아(RHK). 280쪽

기이한 질문은 계속 된다. “달은 생치즈입니까?”라는 말에, 저자는 천문학 역사를 통해 그런 질문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진리의 객관적 기준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 문제에 접근한다. 19세기 초 오귀스트 콩트는 “별들이 너무 멀어서 그 성분을 알 길이 없다”고 장담했으니 과거로 올라가면 이 질문이 꽤 진지하게 들렸을 수 있다.

역사학도에게 제기된 “혁명을 조직하고 성공으로 이끌 방법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수많은 사례와 방법을 열거한다. 최근 일어난 아랍의 봄 같은 경우를 성공한 혁명이라 부른다면 일은 쉽다.

그렇지만 혁명의 범위가 그것으로 제한되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혁명의 목적을 정해야 한다. ‘세탁의 혁명’ 같은 것도 가능하고 러시아의 레프 트로츠키가 말한 세계 동시 혁명도 가능하겠다. 국가체제를 바꾼 볼셰비키 혁명도 있는데 국가 전복은 성공했지만 원래의 이상은 펼쳐지지 않았으므로 성공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전 세계인이 동참하여 아주 장기간에 걸쳐 수행하는 혁명도 예기한다. 소셜미디어나 지상파 같은 매체도 활용할 수 있고 기폭제가 될 만한 동기를 만들 필요도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혁명의 목적이 불분명하고 성공의 기준도 모호하니 성공으로 이끌 방법이 없다. 어쨌든 이 문제는 답변자의 상상력 범위를 시험하는 듯하다.

질문에 셰익스피어와 ‘한여름 밤의 꿈’, 헨리 8세나 샬로트 브론테가 등장하는데 이는 분명 영국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그렇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샬로트 브론테가 제인 오스틴을 그토록 싫어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도 두 작가의 소설을 비교해서 수준 높은 즉석 비평을 행할 수 있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그 까닭을 설명하고는, 이어 두 작가의 성장 배경과 기질 차이를 통해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답변을 보여준다. 둘은 ‘제인 에어’의 제인과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만큼이나 다르고, 그 두 주인공은 샬로트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 각자의 분신이기도 하므로.

“지적 에너지와 창의력은 부드러움에서”

“무솔리니는 고고학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하는 질문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이탈리아 고고학이야 로마로 연결되고, 무솔리니는 로마의 권위를 걸치고 싶었을 터이므로. 그렇게만 답하면 당연 ‘탈락’인데, 관심이라는 말 앞에 6하 원칙을 붙이고 보면 다양한 답이 가능해진다. 그런 배경을 들면 무솔리니의 관심이 과거사의 강탈에 있을 뿐임을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다.

무솔리니 개인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데, 이는 파시즘과 민주주의 나아가 그의 인간성에 대한 견해를 통해 역사 이해와 윤리의식의 측면에서 답변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자로 출발했지만 권력을 잡으면서 파시스트로 돌변했고 이후 자신이 저지른 만행 덕에 근현대 역사상 가장 악랄한 반민주주의자로 기억된다. 그런 무솔리니에게 고고학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 194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죽은 뒤 다시 매달린 무솔리니. 동지와 이념을 배신하고 파시즘의 원조가 되었지만 결과는 비참해서 붙잡힌 뒤에 여러 번 처형당했고 오늘날 민주주의 탄압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런데 무솔리니의 돌변이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주위를 살펴보자.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정권이 좌에서 우로 바뀌자 ‘그’가 시대 조류에 편승해 살아보려 좌에서 우로 살짝 전향했는데 아쉽게도 세상의 주류 우익 인사들이 알아줄(?) 방점이 없었다.

해서 골똘히 생각하다 확실한 역사적 모범을 찾았으니 그가 베니토 무솔리니다. 무솔리니는 청년시절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으나 시대 조류에 편승하여 “사회주의는 죽었으니 남은 것은 원한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극우 파시스트당을 설립, 마침내 권력탈취에 성공했다.

무솔리니가 취한 매력적인 전향 신고식 중 하나는 동지였던 사회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일이다. 그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처형하고, 집을 태우고, 재산을 몰수했다. 옛 동지들 상당수는 산으로 지하로 숨었고 일부는 그를 따라 전향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자신의 전향이 올바르고 정당함을 과시하려 불철주야 노력했고 그만큼 많은 살상을 자행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무솔리니처럼 다루는 행동을 과시함으로써 자기의 은근한(이 점이 중요한데, 그는 세상이 혹시라도 거꾸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건 기록을 남기지 않겠다는 소신도 겸비한 자다) 변신을 인정받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떠나는 한 사람에게 신념에 찬 어조로 협박했다.

“내가 무솔리니처럼 하면 너는 목을 매거나 내 밑으로 기어들어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 먹고살고자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는 걸 굳이 나무랄 필요가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은 ‘그’가 과도한 자기합리화로 종내 스스로를 암담한 처지로 밀어 넣으면서도 자신의 만행이 낱낱이 기억되고 언젠가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무솔리니는 그렇다 치고, 어쨌든 이런 식의 창의적인 접근으로 “독자들의 머릿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생각을 마사지하듯 풀어주고 싶다”는 것이 저자의 희망이다. 그 희망대로 질문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자신의 전공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시각으로 접근해보고, 기발한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는 사고훈련을 반복하다보면, 이 책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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