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한필이 칼럼니스트] 북미간 핵을 둘러싼 무력 충돌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미중간 수 싸움도 치열합니다. 이런 큰 싸움판이 벌어지면 대다수 민초들은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백성임을 절감하면서 커다란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한반도는 예로부터 도사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입니다. 아마 보이지 않는 도사님들이 지금 전쟁 방지를 위해 사력을 다해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이 기도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 하실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오늘 문구를 맛 보시면 생각이 좀 바뀌실 겁니다.

이제 <대학> 전문 6장으로 넘어갑니다. 전문 6장은 주희 선생이 마지막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하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혹시 그 뜻이 미묘하고 섬세해서 본 뜻을 유지하면서도 균형을 맞추며 표현하기 힘들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傳文6

성의(誠意)

所謂誠其意者 소위성기의자, 毋自欺也 무자기야,

如惡惡臭 여오악취, 如好好色 여호호색, 此之謂自謙 차지위자겸,

故 君子 고 군자, 必愼其獨也 필신기독야.

해석하면 이렇다고 합니다.

[이른바 그 뜻을 정성스레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기를)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듯이 (자연스레 그리 된다). 이것이 스스로 겸손하여 사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함에 반드시 언행을 삼가는 것이다.]

일종의 계율편입니다. 이리 못살고 있기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만 바둑 못 둬도 훈수는 할 수 있듯이 한번 읊조려 봅니다.

문장이 한 문장씩은 의미가 있어 보이는데 이 문장들이 어디서 어디로 이어져서 큰 흐름을 만들고, 그 결과 전체 큰 틀을 꾸미게 되는지는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의 글귀는 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의 상태를  최대한 객관화 시켜서 기술한 내용입니다. 이 큰 틀을 전제로 봐야 뿌옇던 풍경에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원래로 돌리건, 공부를 하건 간에 그것을 지탱하는 두 종류의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성축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축입니다. 정성축이 수직선이라면 이성축은 수평선입니다.

정성은 마음이라 불리는 물길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는 잠수함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한테 닿으려 한줄씩 쌓아올리는 원시인의 돌탑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정성축이 주관의 세계라면, 이성축은 객관의 세계입니다. 새벽기도 가서 자손들 미래를 축원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떻게 수학적인 수식으로 표현 가능할까요?

하지만 하늘 땅 마음을 관통하는 정성축은 맹신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이성축의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성축은 사방을 두루 살피는 곤충의 옆눈 같은 것이어서 수평선에 비유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기독교 문명권에서만 발견되는 상징체가 아닙니다.

아마도 주희 선생은 정성이라는 주관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데서 오는 미묘한 균형감에 고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관점에서 오늘 문구를 곁가지를 몇개 놓아보면 이리 됩니다.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 정성됨이라는 예로는 새벽기도간 할머니가 오늘 경전을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30번 낭송해 바치겠다고 자신이 믿는 대상에게 마음으로 고했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지키려하는 것이 정성됨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의도적으로 억지로 그리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마음 씀씀이 자연스레 그리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 되기까지는 갖은 생각, 욕망, 회의스런 마음 등등 온갖 객기가 다 들고 일어 납니다.

마치 온 세상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들고 일어섭니다. 그거 다 밖에서 들어온 것이려니 하고 다시 밖으로 돌려 보내는 것, 그것을 이제 스스로 사양한다해서 자겸(自謙)이라고 한 것이겠지요.

마지막 문장의 신독(愼獨)은 선비의 계율로 많이 언급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홀로 있는 나는 누가 감시하고 있어서 그렇게 삼가고 또 삼가려 한 것일까요?

이 분 저 분 도사님들을 만나본 바로는 대개 비슷하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는 세개의 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뭔가를 하려는 나', '그것을 제어하려는 나', '이 둘을 내려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나'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결국 나 스스로 나를 감시하는 영혼의 인공위성을 띄워 놓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을 '도는 원리' 0(영)사상으로 보면 마음을 이루는 기본 원소인 0(영)은 '거울과 거울 앞에 선 자 같다'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고 부르면 하나님이 나오고, 알라님 하고 부르면 알라님이 나오고, 부처님 하고 부르면 부처님이 나온다고 합니다.

선방에서 '이 뭣고?'라고 칭하는 존재가 바로 이 0(영)일 수도 있습니다. 이 0(영)이라 불리는 거울이 엄청난 반사에너지를 가져서 무한 에너지 발전이 가능한 모양입니다. 그 에너지를 쓰는데 기도만큼 쎈게 없다고 하지요?

왜냐면 이성축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이 정성의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대라는 거지요. 즉 기도의 힘은 무한대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이론적으로라도 성립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 하버드대 박사보다 우리집 할머니가 더 쎌 수 있는 세계가 이 정성의 세계라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은 한반도로 몰려드는 칼빈슨호를 비롯한 핵항모나, 북한이 개발했다는 북극성같은 핵탄이나 엄청 쎄보이지만 정성의 세계에서는 이들을 능가하는 기도의 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무기력함을 느끼거나 걱정하기보다 지금 믿고 계신 신께 '한반도 전쟁 발발만큼은 꼭 막아주세요, 국지전이 아니라 세계대전 됩니다. 그러면 인류명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한 마음, 한 기도 더 간절하게 모아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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