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병인 성균관 전례위원장] 예전에 우리는 그랬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 웃어른이나 선생님, 친구들이 훈계를 할 때면 속으로 말했다. ‘또 공자님 말씀 하고 계시네.’

‘공자님 말씀’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면서도 그 한 마디로 듣기 싫은 소리는 중동무이할 수 있었고, 좋은 충고도 한 귀로 흘려버렸다.

이처럼 ‘공자님 말씀’은 고리타분한 말이라는 느낌과 더불어 약간은 냉소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 말씀하고 있네’ 라든가, ‘부처님 말씀하고 있네’ 라든가 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예수님 말씀’이나 ‘부처님 말씀’을 두고 시대에 뒤떨어진 말이라고 폄훼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생을 약속하는 영원한 진리라고 받든다.

▲ 지난해 9월 8일 서울시 방이동 올림픽공원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공자와 그의 고향, 산동' 개막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성경 구절의 경우 요한복음 몇 장 몇 절에 나온다며 줄줄 외운다. 불교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그 어려운 인도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읊는다.

그런데 공자님 말씀에 오면 대접이 영 달라진다. 영생의 말씀이기는커녕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편견까지 덧씌운다. ‘공자님 말씀’은 더께가 더덕더덕한 고서 속에서나 찾을 수 있

을 뿐이다. 한자말이니 오죽 하랴.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공자님 말씀의 바이블인 ‘논어’를 끝까지 읽어본 현대인은 주변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설령 책을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뜻을 알고 외울 수 있는 구절은 또한 얼마나 될까? 외워서 내 마음 속에 갈무리해 둘 가치가 없어 그런 것일까.

사실인즉 공자의 인의예지 사상은 동양문화권의 모체요, 우리의 존재의 뿌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행동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공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상을 숭모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남을 배려하고,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불의에 분노하고, 가정화목을 중시하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는 것 등은 모두 공자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공자의 사상은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본분을 지키며(君君臣臣夫夫子子·군군신신부부자자) 함께 잘사는 대동사회를 지향한다.

이는 합리적인 이성과 개인주의, 자유를 강조한 서양의 가치관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가치

관은 근대 산업혁명과 더불어 지구촌의 주류 사상이 되었으며 이는 적자생존과 물질 중심의 풍요로운 삶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를 낳았다.

자본주의는 분명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하다. 자연은 파괴되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전쟁과 폭력 등이 만연하고 있다.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니 따뜻한 인간성은 뒤로 밀리고 있다. 급기야 자본주의는 탐욕으로 흘러 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했다.

세계경제는 활력을 잃고 사람들은 어떻게 미래를 대비해야 할지 하루하루 불안해하고 있다.

눈앞에 다가온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인간이 아예 배제될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기계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수리하고, 차를 몰고, 요리하고, 병을 진단하고, 범죄를

판결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효율성을 최우선시하는 자본주의에서 인공지능은 최고의 선이다. 인간보다 더 효율적이므로 인간보다는 기계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쯤되면 자본주의는 극단을 치달을지 모른다.

그래서 세계인들은 지금 탐욕 자본주의의 병폐에 진저리를 내면서 대안의 치유책으로 동양문화, 즉 인간 중심의 유교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다.

인본주의를 강조한 ‘공자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인을 중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조상을 숭모하는 공자의 인본주의만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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