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형섭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 후기 ‘입시 지옥’은 과거제의 폐단으로 나타났다.

“근래 부유한 서울 사대부 집 자제들은 평소에 한가롭게 지내다가 아무 날에 과거를 본다는 사실을 알면 “거벽과 사수는 어디에 있느냐” 하고 소리친다.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대신 짓는 자를 ‘거벽(巨擘)’이라 하며, 글씨를 대신 쓰는 자를 ‘사수(寫手)’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시골의 가난한 선비들이다.

그래서 시험 감독관이 비록 공정하다고 하더라도 선발된 사람들은 모두 부귀가의 자제들이었다.” 《매천야록》, 황현)

책을 덮고 세상 속으로

조선 왕조가 건국된 지 300년, 세상은 변했지만, 조선의 유생들은 옛날 책을 외우며 출세를 위한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주자의 학설을 묵묵히 지켰고, 그 틀 안에서 세상을 이해했다.

의심하거나 오류를 지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재를 바로 보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이 필요했다. 지식인 학자 중 몇몇은 참다운 삶의 길을 생각했고 나아가 세상에 필요한 학문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관념의 책을 덮고 교실(글방)을 뛰쳐나왔다.

조선의 유생들은 관념의 책을 통해 세상과 우주를 바라보았다. 안에서 안을 보았고, 밖을 통해서 안 을 보려 하지 않았다 .

그러나 실학자들은 고착된 사고와 선입견을 버리고 새로운 학술과 문물을 수용했다. 그리고 습득한 신지식을 자기 발전의 계기를 삼았다. 세상을 바로 보는 공부의 시작이었다.

아이의 순박한 눈, 나비를 놓치고 난 아이 마음을 통해, 유행을 무조건 따르고 피상적으로 독서하며 창조적이지 못한 자세는 비판을 하였다.

▲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해 5월 ‘하피첩, 부모의 향기로운 은택’ 전시와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하피첩(霞帔帖)’은 다산 정약용이 1818년까지 전남 강진에 유배됐을 때 만들었다. 멀리 두고 온 자식이 마음에 걸려 아내 홍씨 부인이 전해온 치맛감에 자녀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지어 써 보냈다./뉴시스 자료사진

다산 정약용의 경우, 유배시절 편지에서 몰락한 집안의 생계를 위해 아들들에게 농축산업을 경영하기를 권유했다. 직접 뽕나무, 채소 등을 가꾸면서 실용적인 농학을 함께 하라고 말했다.

“농사지으며 농학을 함께 연구해 세상을 이롭게 하라!” (아들에게 보낸 편지, 정약용)

다산 집안의 농학은 생활의 학문이었다. 아들들은 농사짓고 생활하는 농촌의 일상을 월별로 자세히 기록했고, 농업에 필요한 정보를 찾고 정리했다.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공부를 실천한 것이다.

실학자의 공부방

“스스로 마음에 터득한다면 억지로 하거나 가식적으로 하는 버릇이 없어져서 나날이 진정한 영역으로 나갈 수 있다”《성호전서》, 이익)

실학의 종장 이익이 자신을 찾은 제자에게 공부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이다. 참 공부를 위해서는 기존의 권위를 묵수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여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길러 나가야 한다.

유교의 경전을 ‘주현(主見·현실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하고, 자연 만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경험적인 글쓰기를 통해 실학자들의 즐거운 공부의 여정을 떠났다.

실학자의 공부 비법으로 꼽으라면 우선 메모와 기록을 들 수 있다. 중요한 글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기록했다. 농사짓는 시골 농민과 고기 잡는 어부에게 들었던 생활의 정보도 메모하여 연구의 자료로 삼았다.

‘참 눈’을 뜨고 바라보니 세상이 넓은 만큼 탐구의 대상도 많았다.

실학자의 공부 분야는 다양했다. 자기를 수양하여 사람다움을 기르고, 우리의 산천과 역사, 농업기술과 농기구, 하늘과 해양에 대한 관심 등 생산과 생활에 관련되는 모든 것이 대상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문물에 비해 뒤처져 있는 우리 기술과 과학 지식을 개선하고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대개 ‘잡학(雜學)’이라 여겨졌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실학자들의 공부는 우리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천 번’을 궁리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별별 공부를 세상에 남겼다. 이것은 현실과 민생을 돕고 해결하는 나와 남을 위한 길이었다.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