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한필이 칼럼니스트]

傳文5

격물치지(格物致知)

오늘은 날이 풀려서 늦둥이 아들과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반나절 남짓 놀았습니다. 아이들의 함성과 웃음소리, 봄 내음이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들여다보니 놀이터에도 게임의 법칙이 있었고, 권력과 위계질서가 보였습니다. 모자란 아비를 닮아서인지 사회성 떨어지는 아들 녀석은 가끔 권위에 도전하다가 왕따를 당해서 홀로 훌쩍이기도 했고, 미끄럼틀 그늘 아래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뭐 도와줄 것이 없을까’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멀찌감치에서 슬쩍 눈치를 보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고 타개책을 고민하는 듯이 보여서입니다.

그러다가 일곱살배기 머리카락을 바람이 몇 올 쓰다듬는데 그 위로 햇살 줄기가 비추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찰라의 순간이 고요와 탄성으로 멈추는 듯 했습니다. 덕분에 다시 기도하는 마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녀석이 나름 준비해간 장난감으로 또래 몇몇에게 접근해서 유혹과 시위를 해보았습니다만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아빠랑 놀았습니다. 녀석은 결국 놀이집단에 복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만 바라보며 응원을 보내던 아빠의 시선은 공기를 통해 전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격물치지에 대해 살펴봅니다.

是以大學始敎 必使學者卽凡天下之物

시이대학시교 필사학자즉범천하지물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막불인기이지지리이익궁지 이구지호기극

이를 해석하면 이렇다고 하지요.

[이로써 <대학>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의 모든 사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바탕 삼아 한층 더 깊이 들어가게 했다. 이로써 가장 높고 깊은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했다.]

논문을 처음 써보면 그 학문하는 방법의 엄정함과 전승되어온 지적 유산의 규모에 아득해집니다. 연구 과제를 설정하는 법, 주석 다는 법, 참고문헌을 순서대로 기술하는 법 등등 학문하는 이들끼리 갈고 닦아온 약속을 이해하고 따라 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 전통이 아빠가 한 공부가 아이한테 전해질 수 있는 구조가 되어 문명을 이끄는 힘이 되었습니다.

동양학에서의 지적 전통은 안으로는 마음을 바라보고, 밖으로는 자연을 관찰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오늘 말씀은 현대적 표현으로는 거시 세계에 대한 물리 법칙뿐 아니라 그를 바탕삼아 미시세계에 대해서도 뚫어보는 훈련을 통해 사물을 안팎으로 온전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은 파라솔 테이블에 앉아 몇시간 동안 꼼짝도 안하고 깊은 상념에 젖어 있고는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격물치지하는 이들을 밖에서 보면 이런 모습 아닐까 싶습니다.

서울대 황농문 교수의 '몰입' 혹은 칙센트미하이의 'flow'라 불리는 이런 상태는 일종의 묵상이나 선적(禪的) 경지입니다.

두 분에 의하면 이런 경험은 출가 수도자뿐 아니라 도시인 누구나 일상속에서 경험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노동생산성, 창조성, 행복감 모두를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도는 원리’ O(영)사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격물치지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가장 높고 깊은 경지’는 물질이나 현상에 대해 이성적 이해뿐 아니라 영성적인 이해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각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이런 영적 각성은 ‘마음의 회전력’이라고도 불리는 O(영)력이 각자 개개인에 맞게, 환자에게 링겔 주듯이, 용량과 제공 속도가 적절히 통제된다면 원론적으로는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성의 사이즈가 구슬만하건, 애드벌룬만하건 발생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런 작은 각성들은 일터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부장님이 원하는 기안 스타일과 사장님이 원하는 문서 작성 요령의 차이점을 알아차린 기획팀 김 대리가 맞이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전화 통화중에 우연히 영업하는 박 부장과 기술직 이 부장이 은근 자리싸움중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경영지원팀 유 대리가 호흡한 순간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격물치지는 작고 소탈한 크기라해도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언뜻 소박한 각성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유효한 학습법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각성을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만 볼 것이 아니고 라브와지에, 비비아니, 갈릴레오, 뉴튼, 아인슈타인 등 과학 지성의 징검다리를 놓아온 분들 역시 각성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4차산업혁명>을 쓴 클라우스 슈밥은 앞으로 기계가 대체할 세상에서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마음과 정신, 영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영혼보다는 물질을 가장 숭상할 것 같은 세계경제포럼 회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향후 30년 안에 기계가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특이점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기계를 친구로 만들지 적으로 돌릴지 물었습니다. 이러면 르네상스 이래 정의되었던 인간과 인간존엄성의 근거를 재정의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AI(인공지능)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이 일상화되는 날이 온다면 빈한한 월급쟁이들이 기계 대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바로 이 O(영)적 각성, 영혼의 성장 영역이 될 것 같습니다. 격물치지는 그런 인간 영역의 창조성과 직관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탐구방법으로 보입니다.

결국 외부 사물에 대해 점점 다른 차원으로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은 그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도 더욱 깊은 이해를 요구받는 때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주말 오후에 동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개구짓과 떠드는 소리는 그 어떤 교설보다 선명하게 생명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말해줍니다.

녀석들도 놀이를 통해 이미 격물치지를 행하고 있었겠지요. 이제 영혼에 대한 탐구는 인류 생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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