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국악 가사 이야기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여창가곡 계면조 평거에 ‘녹초 청강상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녹초 청강 상에 굴레 벗은 말이 되어

때때로 머리 들어 북향하여 우는 뜻은

석양이 재 넘어가매 임자 그려 우노라

▲ 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푸른 들판과 푸른 강에 굴레를 벗은 말이 되었다는 것은 벼슬을 물러났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머리를 들어 임금이 살고 계신 곳을 향하여 소리 내어 우는 까닭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조를 연주가(戀主歌) 혹은 연군가(戀君歌) 라고 한다.

이 시조를 지은 사람은 서익(徐益)이라는 사람이다. 선조 때 병조·이조좌랑, 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율곡을 지지하다가 의주목사직을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서익의 서자로 서양갑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서양갑은 광해군 때 같은 서자 출신 친구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서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상소다. 이것이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강변칠우라는 일종의 모임을 만들어 소양강가에서 같이 시를 짓고 술로서 인생을 한탄하면서 살았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거액을 훔쳤는데, 포도청에 모두 잡히고 만다. 이 해가 계축년(1613년)으로 광해군 5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나누어 있었고, 그 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죽였다. 대북파가 남은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던 차에 바로 이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대북파인 이이첨 일파는 이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돈을 모아 군자금을 확보해서 영창대군의 모반에 사용하려고 했다고 조작을 시킨 것이다.

영창대군의 어머니는 인목대비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이 모든 것이 김제남이 시켜서 한 일이다”라고 자백을 시킨 것이다. 즉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가 꾸민 일로 몰아간 것이다. 이렇게 되어 큰 사단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계축옥사이다. 서양갑의 친구인 박응서가 거짓 자백을 했고, 서양갑도 위협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다.

▲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가곡(歌曲)'을 부르고 있는 국립국악원 가곡정악단 정기공연 모습. ‘가곡’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방에서 주로 부른 노래로 시조 시를 관현악 반주의 일정한 선율 틀에 얹어 노래하는 성악곡을 말한다./뉴시스 자료사진

서양갑은 바로 사형을 당한다. 결국 이 조작극으로 인해 김제남도 죽고 영창대군도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부사가 죽여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강화부사는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가두어 두고 장작을 많이 때서 분사(焚死)시켰다고 전해진다.

서양갑 등 7인은 불만을 품고 악행을 일삼다가 이이첨 일파의 꼬임에 빠져, 자신도 죽고 죄없는 사람까지 죽게 만든 역사의 죄인으로 남았다. 물론 이이첨도 인조 반정이후 사형당하고 만다. 계축옥사는 당시의 서얼 문제와 함께 당쟁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다. 서익은 그런 충성스런 노래를 불렀건만 그의 아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다.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은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옥봉의 몽혼’(2009)등 20여 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내기도 했다.

2002년 ‘휴먼앤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하 이사장은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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