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이지양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 남자들은 아내를 맞아 결혼을 할 때 ‘내가 이제 한 집의 가장(家長)이 되는구나. 우리 집을 책임져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반면 여자들은 누구의 아내가 된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출산을 경험하면서 ‘아, 내가 이제 아이 엄마구나’라는 것을 점점 의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죽음을 의식할 때 남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생명보험을 들지만, 여자들은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생명보험을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노부부 ‘박씨’와 ‘순자’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사랑별곡'(구태환 연출)에 출연한 배우 이순재와 손숙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그런데 남자 후배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가장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집에만 가면 ‘가장의식’이 흔들려서 고민한다고 했다.

그는 “저는 아이가 아들만 둘인데, 첫째는 유치원에 다니고, 둘째는 이제 두 살이예요. 그런데 집에만 가면 소외당하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아내가 둘째 아이에게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지만, 맏아들과 저의 관계도 참 묘하거든요.

맏아들은 아빠인 저를 엄마의 관심을 기다리는 대기실쯤으로 여겨요. 심심하면 저한테 와서 놀아달라고 해놓고도 엄마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면, 즉시 팽개치고 그쪽으로 가버려요.

그럴 때면 ‘나는 뭔가? 집에서 나의 위치는 뭔가’ 싶기도 하고, 휴일에도 아내가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고 제가 개입할 틈새가 없다 싶으면 ‘정말 내가 가장 맞나’ 싶어집니다. 저는 가장이라고 생각하고 합당한 역할을 하고 싶은데, 아내는 유능한 담임 같고 저는 유명무실한 부담임 같아요.”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자, 여자 동학과 선배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그건 아이들이 어려서 그래요. 아들이 조금 크면 아들은 모두 아빠의 친구이자 후계자예요”, “아내에게 물어봐요. 그렇게 유능한 담임이 될 수 있는 근원 에너지가 뭐냐고 말이죠. 아마 가장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걸요”, “가장의 존재 위치와 존재 방식은 묘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일에 대한 역할 분담이나 친절로만 따질 수 없는 데가 있어요.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점점 더 가장의 무게감이 필요해지고, 구체적 역할 분담보다는 상징적 존재 의미가 강해져요. 굵은 테두리로 존재한다고요”

조선조 양반 사대부들의 가장의식도 “그 출발점은 아내를 맞이하면서부터이고, 제 가장의식의 뿌리랄까 기반도 아내에게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이 남긴 ‘죽은 아내에 대한 애도시’와 ‘제문’을 다시 읽어보니 더욱 특별하게 보였다.

대가족 제도 속에서의 가장의식은 무척 거창하여 아내의 비중은 미미할 것도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판소리 심청전에서 심학규가 곽씨 부인을 잃고 “아이고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이게 웬일이요 이제 가면 언제 와요? (…) 구차히 사자거늘 누굴 믿고 살어나며, 동지 대한 긴긴 밤을 젖 먹고자 우는 자식, 뉘 젖 먹여 길러낼까” 하며 절망하는 것은 심학규가 맹인인 데다 몰락 양반이기에 더 심한 것도 있지만, 떠르르한 가문의 양반 가장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양반 사대부 집 자제일수록 자신이 가장답게 가장노릇을 할 수 있고, 가장으로서의 체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의 힘에 의지해 있었다. 그것은 점점 나이 들어 명실상부하게 한 집안의 가장이 될 수록 그러했다.

그런 까닭에 가문 좋고, 자신의 벼슬 좋고, 문한으로 이름 높았던 양반일수록 아내가 먼저 떠난 빈자리를 마음으로 앓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도 세상 풍파가 어지러울 때 아내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세파를 달마처럼 건너갔던 것이다.

여러 사람의 도망시(悼亡詩) 가운데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 선생의 도망시는 유난히 감동이 깊다.

자하 선생은 59세 되던 정해년(1827)에 조씨(曺氏)부인을 사별했는데, 모두 5편의 애도시를 남겼다. 그 해에 ‘도망(悼亡)’ 6수와 ‘도망후(悼亡後)’ 5수를, 그 다음해인 무자년 2월 14일에 ‘망실(亡室) 생일에 동파집의 운(韻)을 따서’ 1수와 ‘세모(歲暮)에 동파집을 차운하여’ 3수, 그리고 3년 뒤인 신묘년에 ‘망실(亡室) 회갑일(回甲日)에 옛날을 슬퍼하며’ 1수의 시를 남겼다.

그 중에 ‘도망(悼亡)’ 6수의 둘째, 셋째, 넷째 수는 담담하지만 그 허전한 슬픔이 사람의 마음을 저리게 한다. 시중 일부는 이러하다.

我自支離且小留

나는 지루하다면서도 또 좀 더 살아있건만

夫人厭世百無憂

부인은 세상 떠나 백 가지 근심 없어졌구려.

癡情白髮轎前婢

어리석은 정이 깊은 백발의 교전비(轎前婢)

上食移時哭未休

상식(上食) 올릴 때면 곡을 그치지 않는다오.

결혼할 때 열세 살짜리 신부였던 아내의 가마를 따라 온 교전비(轎前婢)의 정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함께 표현한 둘째 수 등 모두 깊은 감동을 남긴다.

정말 놀라운 것은 가문, 벼슬, 문한, 풍류,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자하 선생 같은 분도 아내에게 이렇듯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장의식의 근저를 이루고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내조의 힘이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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