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재민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센터 수석연구원] 일본의 화폐는 메이지(明治) 정부가 들어서고 4년 뒤인 1871년에야 근대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는 구미(歐美) 선진국에 버금가는 근대국가의 건설을 서둘렀지만, 화폐 제도를 정비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바쿠한(幕藩) 시대의 금은화, 한사츠(藩札) 등을 그대로 통용시키는 한편, 스스로도 '냥(兩)' 단위의 화폐, 지폐를 발행했다.

▲ 일본 1만엔권, 2004 앞면,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이후 메이지 4년 일본 정부는 '신화조례(新貨條例)'를 제정해 금 1.5g을 1엔(円)으로 하는 근대적인 신화폐를 발행, 화폐 제도의 통일을 꾀했다.

현재 일본의 동전(鑄貨·주화)은 1엔과 5엔, 10엔, 50엔, 100엔, 500엔으로 구성돼 있다. 지폐는 1,000엔, 2000엔, 5,000엔, 1만엔권이 있는데 2,000엔권은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1,000엔권 앞면에는 유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1876-1928)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과 벚꽃이 있다.

5,000엔 신권의 앞면에는 메이지 시대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1872-1896)의 초상화가, 그리고 뒷면에는 에도(江戶) 시대 화가인 오카타 코린(尾形光琳·1658-1716)의 붓꽃이 그려져 있다.

1만엔 신권 앞면에는 게이오(慶應)대학 창립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교토(京都) 동남쪽 우지(宇治) 뵤도인(平等院)에 소장돼 있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에도·메이지 시대의 계몽 사상가다. 봉건 타파와 서구 문명 도입을 주장한 그는 특히 자연과학과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해 일본이 근대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일본 1만엔권, 2004 뒷면, 교토 우지 뵤도인 소장 봉황

언론인이자 저술가로서도 유명하며 그의 대표 저작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 등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반면 ‘동방의 나쁜 친구를 거절한다’면서 청나라와 조선에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는데, 이런 시선은 이후 ‘탈아론(脫亞論)’의 표명과 함께 동아시아 여타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지기도 했다.

유키치는 서양 문명에 비해 중국, 일본은 모두 ‘반개국(半開國)’으로 설정했다. 조선의 경우는 중국보다도 더 미약한 반개국으로 규정했다.

유키치는 조선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사설 등에 관련 기사들을 남겼는데, 특히 1882년의 임오군란과 관련해 ‘문명의 적’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나라’로 파악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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