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으로 읽는 오늘의 일본

[이코노뉴스=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푸틴에게 한판승을 빼앗겼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5·16일 일본 야마구치(山口)와 도쿄(東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개최한 정상회담의 결과를 놓고 일본 국내에서 이런저런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 이동준 교수

일본 측이 가장 중요하게 간주해온 영토 문제에서는 사실상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반면, 러시아에 경제협력 ‘선물’만 잔뜩 안겨주게 됐기 때문이다. 푸틴 방일을 계기로 영토 문제에 결정적인 진전을 이뤄 중의원 해산 등에 활용하려던 아베의 국내정치 구상도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무려 6시간에 걸친 정상회담을 마치고 러·일 양국 정상이 16일 오후 내놓은 것은 공동성명이 아니라 공동기자회견이었다. 그만큼 두 나라 간의 입장 차이가 컸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측이 가장 관심을 보였던 남쿠릴열도 4개 섬[하보마이(齒舞)·시코탄(色丹)·구나시리(國後)·에토로후토(擇捉), 일본명 북방영토]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거의 내놓지 못했다.

영토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유연성은 뭐냐”는 <산케이신문> 기자의 다소 ‘당돌한’ 질문에 대한 푸틴의 답변을 통해 명확하게 재확인됐다. 푸틴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양국 간 역사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서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해 북위 50도 이하 사할린 영토를 내준 점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이 고향을 떠나 쫓겨났던 점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 때 미국이 양국 간 평화협정을 막기 위해 위협했던 점 △4개 섬을 내주면 미군 주둔 위험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극동함대에 위협이 생기는 점 등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어 푸틴은 “역사적인 핑퐁 게임은 그만두는 게 좋다”고 쐐기를 박았다. 북방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영토 주권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쟁취한 것이라는 생각을 거듭 표명한 셈이다.

이로써 1855년 러·일 통상우호조약을 근거로 남쿠릴 4개 섬이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특히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에 근거해 2개 섬(시코탄, 하보마이)이 일본에 인도될 때는 주권도 일본으로 이양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일본의 희망은 사실상 백일몽으로 끝났다.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오른쪽)가 16일 도쿄(東京) 총리관저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총리관저 안으로 안내하고 있다./[도쿄=AP/뉴시스]

평소 “아베 정권은 집단적 자위권의 헌법 해석 변경 등 과거 정권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정권”이라고 자랑하며 푸틴과의 영토 문제 교섭에 의욕을 보였던 아베도 확실히 체면을 구겼다.

일본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3000억엔(약 3조원) 규모의 경제협력을 약속한 것도 영토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협조를 기대한 대가성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양국 정상이 합의한 경제협력은 의료·건강 분야, 도시정비, 중소기업교류, 에너지, 러시아 공장의 생산성 향상, 러시아 극동 지역 투자·인프라 정비, 원자력·정보기술(IT) 협력, 인적교류 확대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추진된다. 구체적인 사업의 건수만 60건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미국·유럽 등의 제재로 경제적 곤경에 처한 러시아로서는 커다란 수확이랄 수 있다. 이에 대해 푸틴은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향후 평화조약 체결 협상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영토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은 푸틴을 지켜본 일본 국민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러·일 양국이 영유권 문제를 유보한 채 합의한 4개 섬에 대한 ‘공동경제활동’은 벌써부터 삐거덕거리고 있다. 4개 섬에서의 ‘공동경제활동’에서 서로 자국 법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특별한 제도’를 만들기로 했지만, 그 내용을 두고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7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일본산 아키타견과 장난치고 있다.[모스크바=크렘린궁·AP/뉴시스]

일본은 ‘특별한 제도’를 러시아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러·일 간 조약을 통한 조치로 생각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극동발전성 소관 극동지역투자촉진·수출지원국의 표도르 셰라하예프 국장은 “공동경제활동이 조속히 실현돼야 한다”면서도 “다만 (남쿠릴 4개섬에) 진출하는 일본 기업은 세금을 (러시아에)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극동 지역에 설치하는 경제특구 선도개발구역(TOR)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4개 섬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적 지배를 공식 인정하는 이런 ‘특별한 제도’를 일본 측이 수용할지 의문이다.

결국 ‘특별한 제도’를 둘러싼 협상과 공동경제활동 실시에 이어 평화조약 협상이 이뤄질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가 현재 2018년 9월까지인 자민당 총재 임기를 제도 변경을 통해 최대 2021년 9월까지 연장한다고 해도 임기 내 쿠릴 4개 섬 반환 꿈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러·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방 영토 문제와 관련해 대단한 진전이 있는 듯 풍선을 띄워온 아베의 말이 허풍이었던 것으로 드러나자 야당 뿐 아니라 여당과 국민들까지 ‘아베 외교의 실패’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여당인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은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영토 문제에 진전이 없었다. 국민의 대부분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당의 핵심 당직자가 러·일 정상회담의 결과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은 “여당에서도 (정상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소리는 적고, 낙담과 불만이 퍼지고 있다”고 17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여당의 간부들이 “남쿠릴 4개 섬의 영유권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았다. 진전이 없었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제1야당 민진당의 렌호(蓮舫) 대표는 푸틴 대통령이 좋아하는 유도의 용어를 인용, ‘아베 외교의 실패’를 강조했다. 렌호는 “결과적으로 대규모 경제 원조로 끝이 났다. ‘히키와케’(‘무승부’라는 뜻의 유도 용어)가 아니라 ‘잇폰’(한판승)을 빼앗겼다”고 비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경제를 지렛대로 삼게 됐지만, 영토문제는 좌절됐다”고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를 평가한 뒤 “푸틴의 강경함을 일본이 잘못 읽었다”고 지적했다.

<교도통신>은 17·18일 전국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54.8%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11월 조사 때의 지지율에 비해 5.9% 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러·일 정상회담에서 헛스윙을 한 것이 주된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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