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영화 <증인>을 봤다. 사려깊게 잘 만들었다 싶었는데 아이고 잘 나가다가 이 뭔 헛소린고, 영화 말미에 김향기 본인의 입에서 나온 정상인 어쩌고 하는 말에 완전 깼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기도 유분수지.

▲ 김미영 칼럼니스트

여하간 때마침 읽고 있던 앤드류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자폐 꼭지를 겹쳐 보며 다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공부하는 기회였다. 무척 훌륭한 그 책 얘기는 다음에 하고 (무척 두껍기도 해서 아직 다 못 읽음).

영화에서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고딩은 자기에게 접근하는 이가 변호사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알고 있는 관련 지식을 허공에 대고 말한다. 변호사! 10년 후 사라질 직업 중 하나.

그이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어 자신있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대충들 수긍하는 분위기. 검색해 보니 인공지능(AI)과 로봇 등장으로 20년 내 사라질 직업군으로 법률분야 종사자가 대뜸 뜨기도 한다.

판사는 어떨까?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항소심 결과가 나오자 가까운 이가 사자후를 토하더라. 이렇게 판결이 엎치락뒤치락 하니 뭐가 맞는지 누가 알겠냐고, 이제 3심 가서 또 엎어지고 다시 고법 가면 네 번 재판을 치르는 건데 그 과정에서 변호사들만 떼돈 번다고, 차제에 판사도 싹 다 없애고 인공지능에 맡겨야 한다고.

자신이 겪은 송사의 추억과 (깨진 변호사비!), 저간의 사법농단 사건의 충격파에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평소에 자랑하던 지성이 휴가를 가셨나 했다. (두어달이나 지난 얘기지만) 쟁쟁한 정치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죄에서 유죄, 법정 구속의 비슷한 드라마를 연속으로 보면서 판결/판사에 대한 불신이 항간에 팽배한가 싶고. 최근에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구속영장 기각을 놓고 말이 많은 모양.

뭐 그런 고도의 정치적 사안 말고 이런 경우는 어떤가. 동네 조기축구회 경기에서 골키퍼와 공격수가 심하게 부딪쳤다. 그래서 골키퍼가 사지마비 장애를 입었다. 공격수가 골키퍼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나? (경향신문 2019. 2.7)

1심은 아니요! “골키퍼와 부딪칠 것이 명백하지 않은 상황에서 공을 선점하기 위한 행동을 멈추라고 하는 것은 축구경기의 성질상 기대하기 어렵다.”

2심은 네. “공격수가 골대 위로 넘어가는 공을 잡기 위해 달려가면 골키퍼의 상황과 움직임에 유의해 골키퍼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할 주의의무가 있는데 이를 어겼다.” 고로 4억 1000만원 배상하라.

▲ 영화 '증인'/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대법원은 (별로 나오지 않는) 파기환송, 즉 2심 판결을 뒤집었다. 양자 간의 충돌은 축구 경기 볼 경합 도중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다.

재판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위의 사안에서는 수억원의 손해배상금이 왔다갔다 하고 보통은 감방살이를 하냐 마냐가 걸려 있다.

평생을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고 우리나라 사형제 폐지 안했으니 죽일 수도 있다. 사안에 따라서는 한 나라의 제도와 관행을 바꾸기도 한다. 이해관계 걸린 이들이 한 둘일까. 국가란 폭력을 독점하는 기관이라는 정치학 개론을 실감나게 하는, 나라의 결정이다.

사안마다 걸려 있는 지식과 정보의 양, 증거와 증언의 범위, 그것의 진위와 맥락을 잡는데 걸리는 전문 지식과 기술의 깊이가 다르겠지만, 위와 같은 간단한 생활상의 사안을 놓고 보건대 판사의 결정이란 결국 그 어떤 결단과 도약을 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난 일단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 좀 긍정적으로 볼 여지도 있지 않나 싶다. 막말로 일사불란한 검사 조직이라면 나오지 않을 현상 아닌가. 그만큼 사법부는 각자 논다는 증거? 아니, 라인이 많다는 증거인가?

판사의 이력과 정치색을 놓고 판결을 설명하기는 가장 쉽고 흔한 방식인데 쉬운 만큼 뭘 새롭게 설명하는 힘은 떨어진다. 왜 구속영장을 기각했지? 응 원래 문빠야. 이런 건 같은 편끼리 농담은 될지언정 ‘설명’은 아니고 공적 토론에도 낄 수 없다.

판사들 싹 다 없애고 인공지능에게 맡기자는 말을 진지하게 하는 이가 꽤 있는 것 같으니 진지하게 반박해 보자. 인풋과 아웃풋의 두 가지로 나눠서.

우선 인풋. 판결을 인공지능에게 맡기자는 것은 그것을 원자료(raw data)를 입력하는 이의 손아귀에 맡기자는 말과 같다.

▲ 뉴시스 자료사진(칼럼 내용과 관련 없음)

명백한 사실만 입력하면 되지! 아이고 거기에는 사실 자체 (fact itself)가 존재한다는, 현대 지식론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전제가 깔려 있어요. 해당 사안을 구성하는 무색무취무해한 중립적인 사실이 있고 그것을 열심히 발굴, 발견, 축적하면 진실에 도달할 것이라는 무지무지 ‘순수한 영혼’의 생각 말입니다.

위의 축구 사안에서 사실은 뭔가? 골키퍼와 공격수가 충돌해 한 쪽이 사지마비의 중대한 부상을 입었다, 이다. 비디오 판독 들어가고 누가 어느 각도에서 어느 속력으로 어떤 중량으로 돌격했나 중립적인 수치가 나올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판결은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방주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치고 나갔다고 보아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한 판결과 공을 놓고 다투는 것은 축구경기에서 다반사이니 잘못없다고 한 판결에서 다시 돌아가 보면 각 판결이 담고 있는 해석은 물론이고 주목하는 사실 자체도 다름을 알 수 있다.

두 선수가 충돌해 한 쪽이 다쳤다는 복잡할 것 없는 ‘사실’조차 2심 판사 ‘보기에는’ 과도한 승부욕에 눈이 뒤집힌 공격수가 무리하게 거의 폭력적으로 경기해서 일어난 일이고 1심과 3심 판사가 보기에는 승부를 다투는 경기에서 충돌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여순사건 재심 인용 결정에 대한 재항고 등 전원합의체 판결을 위해 앉아 있다./뉴시스

인간의 행위는 시공적 맥락 속에 있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다시 축구란 무엇인가, 조기축구회란? 공격수의 본분은? 골키퍼의 자세는? 등등의 질문에 대한 답이 걸려 있다.

물론 둘이 충돌해 한 쪽이 다쳤다는 팩트는 부정할 수 없지만 – 그걸 다투려고 송사를 벌이는 게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이미 해석의 단계로 넘어간 일이다.

둘째, 아웃풋 상의 문제. 중립적인 사실들을 쫙 입력하면 거기에 적용될 법조문과 판례를 인공지능이 싹 다 검색해 일대일 매칭하듯 판결을 내린다? 이해관계와 정치색에 좌우될 리 없는 중립적인 기계가 산수문제 풀 듯 항상 같은 답을 도출할테니 얼마나 객관적이고 믿을만한가?

전례가 없어 관련 법 조항도 없고 판례도 없는 것은 어쩌지? 사회변화를 반영하는 적극적인 법해석과 전향적인 판결은 어떻게 나오나? 새로운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전례와 인습에 따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사회(실재하지 않는, 있다면 디스토피아일)에서나 인공지능이 분쟁의 해결사로 될 것.

결국 첫째도 해석이고 둘째도 해석이다. 만변하는 인간사를 인간이 해석해야 하고 판사가 판결해야 한다. 판사를 어찌 믿고? 판사 스스로야 남의 생사를 판단하는데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엄혹한 책임 속에 공부 또 공부하는 수밖에 없겠지.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이라는 것의 엄중함.

되도록 한 사람의 판단력에만 맡기지 말고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칠 것. 판결문을 시민 앞에 숙제하듯 자세히 써 언론에 공개할 것.(안희정 1심 판결의 판결문이 매우 자세하여 재판부가 편견을 가지고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했음이, 의도치 않게, 드러났다고 한다.)

▲ 영화 '증인'/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실 발견의 노력(유해 발굴 같은)이 중요한 사안도 있다. 나올 사실이란 게 피해자의 증언뿐일 때 해석은 엄청 중요해지고 하나의 해석을 뒤집은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 개탄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관점주의와 회의주의와 불가지론과 반지성주의와 힘의 논리로의 하강의 나선형이 아니라 숙의 민주주의로의 끝없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이 땅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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