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이러다 초초미세먼지도 나올지 모르겠다)가 압박하는 꼼짝 마 계엄령 속에 계획했던 사교활동(싸돌아다니기)들을 무기한 연기하고 다만 한가지 활동을 반 강제로 실시하였으니, 이름 하여 만인의 취미라는 독서.

▲ 김미영 칼럼니스트

회색의 대기가 동반하는 우울을 달래느라 제목도 즐거운 <쾌락독서>를 들춰 봤다.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이력을 담은 책이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통쾌한 심정으로 읽었지만 약간 아니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가령 아드레날린 만땅의 아줌마 아저씨들의 호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산행을 접고 다른 곳으로 간다든지 하는 것.

나 역시 자기 음악 취향을 폭력적으로 공유시키는 행태에 (나이 든 사람만이 아니라 젊은 축도 그러는 이가 있다) 눈살을 찌푸린 적이 여러번이고 다 늙은 중년들이 오빠 누나 불러대며 깔깔대는, 그 높은 옥타브의 음성 폭격을 피하느라 의도치 않게 오버 페이스를 하는 적도 있지만, 그래서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흐흐 나같은 인간 여럿이군 했지만, 나로선 동네방네 대고 그렇게 선언할 것 같지는 않은 게, 무엇보다도 그런 불평에는 어느 정도의 배운 티(?)가 스며 있는 것 같아서이다.

뭐랄까, 대절 버스 안에서 관광버스 춤을 추는 여인네들을 유심히 돌아보는 것과 비슷한, 그 어떤 계급성? 게다가 책의 뒷부분에 쓴 판사 일과 관련된 내용 말고 일반 시민으로서 느끼는 부분 그 모두는 일찍이 나도 수도 없이 말한 것인데, 나는 ‘투덜이 스머프’. 반면 문유석은 메니페스토를 발표하는 ‘개인주의자’.

역시 말 자체보다 말이 발언되는 포지션이 중요한 거라, 어쩌고 하는 심사. 그런데 본인이 이렇게 써 놓았더라. “...과분한 관심을 받기도 했던 이유의 70퍼센트 이상은 판사라는 직업이 주는 의외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량진 만홧가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고시생 시절의 내가 <개인주의자 선언>을 써서 출판사에 가져갔다면 뭐라고 했을까? 네네, 선언 많이 하시고요, 응원합니다. 파이팅!”(179쪽)

사나운 심사가 풀리면서 머쓱해졌다. 나아가 이런 깨달음까지 이르면?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195쪽) 이 남자 쫌 짱인 듯.

책 읽다 한바탕 웃었다. 고시 한번 떨어지고 재수할 때 모습. “억지로 법서 내용을 머리에 넣으려고 삼십분 정도 용을 쓴다. 한 시간 동안 엎드려 잔다. 삼십 분 동안 화장실에 다녀온다. 그런 다음 계산한다. 앞으로 한 시간에 몇 쪽씩 하루 몇시간씩 공부하면 이 책을 마치는지. 계산하는 동안 흘러간 시간을 참작해 다시 정교한 계획을 짠다. 배고파 온다, 밥 먹으러 간다.”(110-111)

▲ 문유석 지음 쾌락독서, 문학동네 펴냄

작심하면 책상머리 앉아 심혈을 기울여 계획 먼저 짜고 그 계획만으로 포만감에 빠져 다시 퍼지던 나. 훌륭한 판사님도 소싯적엔 딴 짓도 꽤 하셨군, 하는 정다운 기분. 고시를 꿈꾼 적도 없고 잘 나가기를 바란 적도 없지만 여하간 오늘날의 나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데 문유석은 왜 저토록 멋있어졌지? 스스로는 에이스가 아니라고 하지만. 역시 성취동기와 지능의 문제인가?

격하게 유쾌해한 부분은 ‘내 취향이 아닌 글들’ 꼭지. 지식인풍의 ‘있어보이는’ 품위 있는 글을 그는 ‘죽은 글’이라 한다. 그런 글을 쓰는 비결 첫째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쓰는 천박함을 피하고 관습적 인용을 철칙으로 알기. 중산층 욕하려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으로 우회할 것 등등.

두 번째는 충무공 정신. ‘내가 뭔 소릴 하고 있는지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쉽게 알아보게 하는 것은 노출증. 그런 글들의 등록상표는 암기해 써먹는 필수 어휘들. 층위, 서사, 지점, 착종, 아포리아와 디아스포라 등등.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영원히 헷갈려 하는 나로서는 격하게 동감하는 바이다. (그런 글의 최근 예로 <루저 아들>을 꼽고 싶다. 부시 얘기 정도로 알고 시작했는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고급 어휘들 덕분에 약간의 향수를 감미한 매저키즘적 쾌락을 잠시 누렸다.)

내친 김에 문유석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얘기를 할 때도 굳이 ‘개인적으로’를 덧붙이는 강박증을 언급하던데,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누가 그러면 꼭 “그럼 개인적으로 안 붙인 말은 다 집단적으로 라는 말이냐?” 토를 단다. (옆에서 듣는 애들이 지겨워한다.)

가령 민주노총 간부가 언론 인터뷰에서 경사노위 참여 거부가 민주노총 입장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참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뭐 이렇게 말한다면 그 때는 ‘개인적으로’ 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

어떤 집단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리 (일반인에겐 극히 드문 경우)가 아니고 그냥 한 사람이 자기 의견이나 기호를 말하는 것이라면 저는 이러이러합니다 이러면 된다. “저는 개인적으로 문유석의 글을 싫어합니다” 이러지 말고.

그런 말버릇을 좀 아니꼽게 느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한 때 유행했던 “(뭐뭐뭐) 인 것 같습니다” 의 최신판 아닌가 싶다. 저는 문유석의 글이 재밌습니다 할 것을 저는 문유석의 글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약간의 자신없음, 약간의 겸사, (머리에서 입까지의 거리를 채우기 위한) 약간의 시간 벌기, 약간의 겉 멋. (“내가 보기에는”, “내가 봤을 때는”이라는 말버릇도 있는데 들을 때마다 치를 떤다. 너가 보지 누가 보냐. 뭘 맨날 보냐.)

▲ 문유석 판사/문학동네 제공

책읽기, 독서에서 진지함의 무게를 덜고 유쾌하게 놀이로 접근하자는 이 책의 취지에 백 프로 동의한다. <스카이 캐슬>이 블랙 코미디로 제대로 재미있었던 때는 독서 클럽 얘기 나올 때다. 중딩까지 있는 독서모임에서 무려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니, 크크.

한 때 이 땅의 모든 고딩들, 아니 논술학원 다니는 고딩들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끼고 다녔다. (샌델이 예시로 든 이야기만 발췌독하면 읽을만 하지만.) 서울대 필독도서 100선이니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100권의 소설이라느니 하는 목록들이 허다하다. 기죽을 거 없다. 리스트 만든 그들도 안 읽었다.

책읽기에서 ‘교양’의 부담을 덜자. 어차피 그 ‘교양’, 식민지 왕자 공주들의 서툰 흉내내기에 불과한 적이 많다. 오역 투성이의 서양 고전을 이해도 못하며 꾸역꾸역 읽던 나의 중고딩 시절을 돌아보면 그 문화적 허영심이 좀 귀엽기는 하지만 웃픈 것도 사실이다.

문유석의 독서 취향이 나와 맞는 것은 아니다. 책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은근 기대하는 것은 내가 몰랐던 좋은 책을 소개받을까 하는 것이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나는 그런 실용적인 이유로 읽는다. (독서계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그의 리스트에 오른 책을 읽고 쓴 컬럼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는 것에서 증명된다. 물론 컬럼 쓴 이는 그 책을 왜 읽었는지 잘 말 안한다.)

그러나 문유석의 책에서 건진 리스트는 별로 없다. 나 역시 긴 이야기책을 좋아했지만 (<토지> 짱!) 무협지까지 튀지는 않았고 (가방 가득 무협지 넣고 다니던 대학원 선배 보며 무협지 읽는 것은 패망의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연탄 가스 냄새 스민 단칸방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만화책 보던 중 일 시절 이후 만화라는 문화적 혜택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학교 도서관에는 만화가 없었다.

▲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 2014년 12월 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박원순 시장과 대담을 하고 있다./서울시 제공

그가 죽은 글이라 비난할만한 책에 재미를 느낄 때도 꽤 있다. 거듭된 노출로 인한 정들기 차원? 그러나 다른 이의 독서 이력을 홀깃 보는 것은 재미난 일이다. 친하고 싶은 사람의 책 컬렉션을 보는 기분? 그게 나의 컬렉션과 많이 다르지만, 달라서 더 재미나고 신기하지요.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