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안나푸르나에 다녀왔다. 안나푸르나 간다고 하니 “거가 어데?” 라는 반응이 의외로 많았다. 모두 들어본 적은 있는 에베레스트가 네팔 동쪽에 있다면 안나푸르나는 서쪽에 있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5년 전 대학 입시를 치룬 아들을 끌고 셋이서 갔었다. 푼힐 전망대까지 가는 패키지 상품으로, 이름하여 로열 코스. 영국 귀족이 가마 타고 간 길이라고, 쉽다고, 여행사 직원이 꼬드겼는데, 나는 왜 귀족에 동일시하여 갈 엄두를 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마 지고 올라가는 ‘셰르파’에 동일시했어야 할 것을.

지금이야 걷는 것을 취미이자 특기로 삼고 있지만 동네 뒷산도 안 가던 시절에 무슨 배짱으로 히말라야를 갔으며 나를 그 곳으로 이끈 욕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아하다. (이번에 들었는데 5000m 이하는 히말라야로 치지도 않고 딱히 이름도 없다고 한다. 그냥 네팔의 동네 뒷산. 푼힐 전망대는 3120m, 그러니 히말라야라기보다 히말라야를 바라볼 전망대를 간 것.)

그야말로 죽을 똥 쌀 지경이란 말이 절로 나오게 힘들었다. 그렇지만 뭐 내 짐을 딴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았고 누구 부축을 받지도 않았고 꼴찌를 하지도 않았다. 내 몸 힘든 거 나만 알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눈 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스냅 사진 같은 풍경이 그 후로 자주 떠오르고, 그리웠다. 힘든 몸뚱이에 각인된 아름다운 풍경이라니, 그런 아이러니가 가능하다.

▲ 네팔의 안나푸르나산이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황금처럼 번쩍이고 있다./김미영 칼럼니스트 제공

2000에서 3000에 이르는 산간 마을들. 알뜰히도 가꾼 계단식 논밭을 따라 한도 끝도 없이 계단을 오르고 또 하염없이 내려가던 기억. 다랑이 논에는 무엇이 자라는지 대부분 초록이었고 1700높이의 마을에는 제주도 유채꽃 같은 노란 꽃이 흐드러졌다.

찬란한 햇빛 아래 머리를 감은 여인네가 파란 하늘, 청록색 담벼락을 배경삼아 탐스런 머리채를 느릿느릿 빗어 내리고 학교 파해 나오던 검은 교복 아이들은 기브 미 초코렛을 연발해 울컥 하게 만들고. 동네 개는 가이드인 양 다음 롯지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그 풍경 그 추억에 이끌려 다시금 안나푸르나를 간 것이다. 이번에는 난이도를 높여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ABC, 4130m) 가는 코스로다가. 카투만두는 여전히 먼지 구덩이였다. 산맥에 둘러싸인 분지라니 어쩌겠어. 지진 난 지 4년이건만 여전한 지진의 흔적.

▲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본 구름속의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신성함과 신비함을 더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포카라 가는 국내선 안에서 하얗게 펼쳐진 히말라야를 보며 들뜬 때가 좋았다. 땅에 내려오니 아무 산도 안 보인다. 전에는 포카라 공항에서 나란히 서서 저건 안나푸르나 1봉 저건 피시테일, 학습도 하고 사진도 박았건만, 사위가 뿌옇다.

버스로, 지프로 될 수 있는 한 많이 올라가 1380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짐을 끈으로 묶어 그걸 정수리에 얹어 나르는 포터들의 모습, 노새처럼 일하는 노새들의 행렬. 왜 피시테일인가 이해를 못했었는데 두 갈래 꼬리 지느러미를 제대로 원없이 볼 수 있었고.

힌두교 혹은 불교식의 작은 제단에 묶여 있는 색색의 깃발들, 지누단디(1780m) 정도에서 본 대나무 숲과 원숭이 무리, 햇볕 아래 앉아 돌을 망치로 두드려 잘게 부수던 노인의 터무니없는 노동, 쇠로 만든 너비 150cm 정도의 문을 역시나 정수리에 걸어 지고 가던 젊은이 등등 이국적인(?) 풍경이야 열거하기 바쁘다.

그 모든 풍경을 압도하는 배경으로 먼지가 있었다. 포카라(820m)에서 나이폴(1070m) 또다시 사와이(1380m)에 이르는, 우리가 버스와 지프로 이동한 거리는 먼지 그 자체로 기억된다. 비행기에서 보니 네팔의 산들은 흙산이더라. 거기다가 난개발로 여기저기 산을 들쑤셔 놓고 도로는 모두 흙길의 비포장.

▲ 엄청난 무게의 짐을 맨 네팔 안나푸르나 주민이 슬리퍼만 신고 산비탈 계단을 날듯이 오르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비포장도 급이 다른 비포장이다. 오죽하면 산에 오른 첫 날 실제로 걸은 것은 1시간 반 정도인데 걸음 수가 2만8000보가 나왔다. 버스로 두 시간 반 지프로 40분을 마구 흔들리니 그걸 바보같은 기계가 활기찬 걸음으로 받아들인 것.

도로변의 나무들은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써 유조선에서 유출된 기름을 뒤집어 쓴 가마우지 사진을 연상시켰다. 토건국가, 토건자본 비판만 할 줄 알았지 시멘트로 ‘공구리치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인지 이제야 알았다.

네팔 흙은 입자가 고와 시멘트 가루 같다. 그게 마구잡이로 펄펄 날린다고 생각해 보라. 무슨 풍경이 아름다울까. 마스크 쓰고 목도리 두르고 늙은이 해소천식 같은 기침을 폐 밑바닥을 긁어내듯 연발하며 실눈 떠 열심히 본들 그리 감명 깊을 리 없다.

2500을 넘으니 노새도 없고 노새 똥도 없고 똥가루가 다량 함유된 먼지도 없어 살만했다. 대신 눈과 얼음이 등장. 아이젠이 있으면 별 어려움 없다. 항상 느끼는 건데 우리나라 북한산 갈 정도면 어느 산이건 가지 않겠나 싶은 게, 칼바위도 없고 할딱고개도 없고 평이한 길을 다만 고산증을 걱정하여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이니 말이다. (베이스 캠프 정도가 아니라 더 올라가면 얘기가 다르겠지.)

여가 어데? 지리산? 할 정도로 한국인이 많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비수기인 지금 한국인이 90%이고 성수기에는 60%란다. 내 느낌으로도 한국인이 90%, 서양인이 8% 중국인 나머지이다. 산악인이라 할 만한 사람보다 은퇴한 60대가 태반이고 전에 비해 젊은이가 많아졌다는 게 눈에 띈다.

▲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나선 관광객들이 네팔 국화 랄리구라스꽃과 만년설을 이고 있는 수많은 고봉들을 감상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설악산, 지리산에서보다 많은 젊은 커플을 안나푸르나에서 본 것 같다. 별 긴장감 없이 치렁치렁한 ‘귀곡산장’ 머리를 휘날리며 운동화 바람에 온 대학생 연배의 여성과 그의 남자(사람)친구의 짝을 하루에 세 쌍이나 봤다. 저들을 이리로 이끈 욕망은 또 뭐지?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3700m)까지 잘 올라 아 내년에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5100정도) 가자 어쩌고 찧고 까불었는데 밤중에 화장실 갈 때 모자를 안 쓰고 맨머리를 영하 15도에 노출하는 우를 범했다.

고산증이 곧바로 엄습하여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두근두근, 기운없어 꽉 조이지 못한 침낭 구석으로 바람이 쳐들어오고, 당연히 잠은 한 잠도 못 자고. 결국 ABC를 가지 못했다.

▲ 지난 2012년 10월 18일 네팔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코리안 루트 개척에 나섰다 실종된 산악인 고(故) 박영석 대장의 안나푸르나 추모비에 태극기와 조화 등이 놓여 있다./김미영 칼럼니스트 제공

나의 키워드는 즐기기이지 도전이 아니여 하며 별 갈등 없이 새벽 산행을 하지 않았는데 새롭게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산덩어리를 배경으로 찍은 남편의 사진을 보니 아이고 그냥 좀 무리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다시 가고 싶지 않으니 더더욱 힘을 모았어야 했는데, 그 놈의 귀차니즘이 나의 발목을 잡았구나.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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