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역사는 우리에게 현실의 데자뷔를 광범위하게 불러일으키며 이를 곱씹을수록 왕왕 엄중한 교훈을 남긴다.

▲ 김선태 편집위원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편을 재해석하며 조선 개국 과정에 숨겨진 숱한 데자뷔와 교훈을 들춰내는데 그중 전제(田制)를 둘러싼 공방은 단연 압권이다.

고려 29대 충목왕이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의 후계 충정왕에 이르러 정세가 혼돈으로 치닫자 원나라 순제는 1351년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28대 충혜왕의 친동생인 왕기를 후사로 선택했는데 그가 공민왕이다. 고려의 중대 사안을 대부분 원이 결정하던 때. 국권 회복에 신명을 바치려 한 공민왕에게 원 황실의 딸이면서도 남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준 노국대장공주는 더없이 강한 원군이었다.

공민왕, 낭만적 개혁 군주의 한계

군벌 혁파와 왕권 회복에 나선 공민왕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표한 이가 있으니 원 순제의 제2황후 즉 기황후를 누이로 두어 방약무도한 행실을 일삼던 실권자 기철이다. 기철은 공민왕을 우습게 보았고 심하게는 그의 동생 기원조차 공민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려 들었다.

그런 기철이 원 순제로부터 경왕이라는 칭호를 받자 급기야 자신이 왕과 동급이라고 여길 지경에 이른다. 때를 같이 하여 공민왕은 기철에게 경왕 책봉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한껏 기세가 오른 기철이 대궐에 도착하자 매복했던 무사들이 그를 에워싸 철퇴로 내려쳤다.

공민왕은 친원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숙원이던 북벌에 나서니 원에 부역하며 고려 왕실에 위세를 떨치던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두만강 건너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일은 대표적인 업적이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라 명했다. 이때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성을 들어 바쳤는데 이를 계기로 이자춘·이성계 부자가 고려 정계에 진입한다.

▲ 『조선왕조실록. 1: 태조』 = 이덕일. 다산초당. 372쪽. 2018년 07월 03일 출간

선대의 무능과 권문세족의 전횡으로 백성의 원한이 왕실을 위협하기에 이른 상황에서 내부 개혁에 나선 왕은 조정에 포진한 일명 세신대족(世臣大族)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때마침 공민왕은 든든한 우군을 얻었으니,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확고한 개혁 의지와 능력을 보인 승려 신돈이 그였다. 전권을 위임받은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수장이 되어 좌고우면하지 않고 토지개혁에 나섰으며 더불어 노비로 전락된 백성들의 신분을 속속 회복시켰다.

당하고만 있을 리 없는 세신대족들은 단번에 신돈의 약점을 찾아냈다. 신돈의 권력은 왕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그 힘을 뺏으면 되는 일로, 이는 신돈이 역모를 꾸민다는 투서로 인하여 현실화되었다. 신돈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얼마 안 가 노국공주마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양 날개가 꺾인 새처럼 개혁 의지를 잃었고 그로부터 7년 뒤 신하들에게 시해되었다. 공민왕의 예술가적이고 낭만적인 기질이 낳은 비극이다.

이성계의 심려(深慮), 정도전의 원모(遠謀)

때는 원이 사실상 몰락하고 주원장의 명이 부상한 무렵. 우왕이 등극하면서 조정은 친원파와 친명파로 쪼개지고 위로는 호족이 들끓고 아래로는 왜구가 창궐했다. 이 시기에 이성계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동북방 세력을 기반으로 전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일찍이 공민왕이 “당대에 활쏘기로 오직 이성계 한 사람뿐”이라 평한 신궁의 경지와 황산대첩의 엄청난 전공은 그를 일약 전국적 영웅으로 부상시켰다.

3년 뒤 이성계는 유배지를 전전하다 자신을 찾아온 한 젊은 서생을 만나 거듭 탄복하니 그가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에 근거하여 새 왕조 개창이라는 대업을 제시했고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여 정도전을 왕사로 삼았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을 동반하여, 태조실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무릇 임금이 도울 만한 것은 (정도전과)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었다.(138쪽)

결행의 시기는 외부로부터 왔다. 1388년 5월 우왕은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압록강을 건너 철령위를 치라 했다. 이성계는 반론을 올리고서도 왕명을 어기지 못해 북상했는데 마침 우기 중이어서 핑계를 대고 위화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설득을 거듭한 끝에 조민수의 동의를 받은 이성계는 출정 한 달 나흘 만에 말머리를 돌려 왕궁을 지키던 최영을 사로잡고 우왕을 폐위했다. 하지만 이색을 중심으로 한 신료들이 우왕의 아들 창왕을 보위에 올리고 창왕은 다시 조민수를 회유하니 되레 이성계의 처지가 위태했다.

이때 정도전이 나섰는데 그는 대사헌 조준을 내세워 토지개혁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고려 말의 토지제도는 조세 제도와 군사 제도로 연결되는 구악 폐습의 중심고리였다. 때문에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상소는 정국의 다른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다.

왕의 측근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조민수는 유배되고 이색은 명의 힘을 빌리려 남경에 입조했으나 태조 주원장에게 비웃음만 산 채 간신히 귀국했다. 틈을 노려 우왕을 복위시키려던 최영은 이성계의 의심을 사 죽임을 당했다. 모두 위화도 회군 뒤 7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성계는 고삐를 더욱 죄려 했고 이듬해 말 정도전의 책략을 받아들여 우창비왕설(禑昌非王設), 우왕과 창왕은 왕 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 귀결인 폐가입진의 논리에 따라 창왕은 폐위되고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이 보위에 올랐으니 그가 공양왕이다. 왕은 재조(再造)라는 표현을 써 자신을 옹립한 회군 세력을 개국공신 위에 놓을 정도로 칭송했는데, ‘고려사’ 공양왕 편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이성계 등이 이름을 바로잡아 다시 일으켜서 왕실을 재조했으니 그 공은 실로 태조 때의 개국공신 아래 있지 않고 영원히 잊을 수 없다.(231쪽)

고려를 멸망시킨 슬로건, “백성에게 토지를!”

그러나 누가 세웠건 왕 씨는 왕 씨다. 겉으로 이성계에게 의지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세력을 키웠으니 대학자 이색, 혁혁한 무공의 장수 변안열 등이 왕을 받쳐주었다. 그럼에도 사전 혁파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았으니 왕이 불허했음에도 조준, 정도전 등은 끈질기게 이를 주장했다. 이윽고 민심이 돌아섰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냉혹한 반격에 나서 변안열을 역모로 엮어 처형한 데 이어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을 계기로 반대파를 대거 제거했다.

▲ 태조 이성계 어진 = 『李王家記念寫眞帖』(半島新聞社出版部, 1920)

이성계의 칼날이 왕의 목전에 이르자 회군에 찬성하여 9공신의 하나로 불린 수문하시중, 즉 이성계와 공동 재상으로 있던 정몽주가 왕을 감싸고 나섰다. 그런 정몽주를 이색이 거들어 둘이 조정을 장악할 기세를 보이자 이성계는 무력으로 눌러 이색을 귀양 보내고 공양왕으로 하여금 과전법을 반포하게 했다.

과전법은 정도전의 원안에는 미치지 못하나 전주(田主)에게는 수조권만 주고 농민에게는 실질적인 소유권인 경작권을 주는 제도이니 이로써 이성계는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평가한다.

백성에게 토지를 주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 제도를 정제하여 일대의 전법으로 삼았으니, 전조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나은 게 아니겠는가?(263쪽)

궁지에 몰린 공양왕에게도 기회는 왔으니 재위 4년, 1392년 3월 이성계가 말에서 낙상하여 멀리 벽란도에서 드러누운 일이다. 때를 놓치랴, 이색과 정몽주 등이 합심하여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니 조준, 남은 등이 삭탈관직 되고 유배길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당시 귀양 중이던 주범 정도전이 탄핵 대상에서 빠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왕당파의 실수였다.

대세를 장악하고도 이색 등은 이성계를 처리할 방안을 놓고 갑론을박하느라 허송했다. 이방원이 홀로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간파하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방원이 자신의 거병을 청했지만 부친이 허락하지 않자 그대로 이성계를 가마에 태워 개경으로 모셨다. 이성계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는 소식에 왕당파들이 혼란에 빠지자 정몽주가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이성계의 집을 방문했다. 이에 이방원이 가신 조영규 등을 불러 되돌아가는 정몽주의 뒤를 쫓도록 하여 선죽교에서 척살한 것이다.

공양왕이 목숨을 구걸하려 ‘맹세문’이라는 것을 발표했지만 이성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그해 7월 왕대비를 보내 왕을 폐위시켰다. “더 이상 왕건의 후예를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275쪽)

나흘 뒤인 1392년 7월 16일 그의 나이 쉰여덟, 백관들의 간청 속에 이성계는 새 왕조를 개창(開創)했다. 과전법 실시와 더불어 개국 태조가 내린 제1 개혁 조치는 토지 매매를 금지시킨 일이다. “토지 매매를 허용하면 또다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뉠 것을 우려한 극약 처방이었다.”(285쪽)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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