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서승 선생은 이 땅에서 한 인간의 육신이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 그럼에도 한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하게 레드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산증인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

이 책은 19년에 걸친 그 생생한 증언의 기록이다.

선생은 1945년 전쟁 중에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사건은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하던 때인 1971년 3월 6일 귀경길 비행기 안에서 시작되었다.

‘서승’을 부르는 기내방송과 함께 화려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스튜어디스가 ‘탑승 확인’을 한 다음 공항을 나와 택시 승차장에 선 때였다. 갑자기 기둥 그늘에서 젊은 남자가 나타나 짐을 낚아챘다. 막무가내로 끌려들어 간 홀에서 처음 맞닥뜨린 건 박박머리에 깡마르고 뱀처럼 차가운 눈빛의 남자.

“내가 대공처장 김교련(金敎鍊)이야!”

“왜 나를 잡아온 겁니까? 체포영장을 보여주세요.”

“간첩에게 무슨 영장이야, 언제라도 죽여도 돼. 야, 끌고 가.”

그렇게 보안사에 불법 체포되어 시작된 가혹행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혐의는 두 가지, 북의 지령으로 서울대학교에 지하조직을 만들려 했고, 김상현 당시 국회의원을 통해 김대중 후보에게 북의 자금을 전달했다는 것. 박정희 3선 가도에 놓인 시나리오의 희생양이 된 그에게 증오를 수반한 국가 폭력이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선생에게 더욱 무서운 일은 고통을 못 이겨 그들에게 굴복하는 일이었다.

박정희 3선 음모, 상상불허의 희생자

선생은 결단했다. 어느 아침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기름통을 들어 올려 머리 위로부터 들이부었다. 탁자위에 있던 조서를 말아 난로 불을 붙였다. 기름이 석유가 아닌 경유인 탓에 불은 천천히 살점을 파고들었지만 비명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뒤늦게 달려온 경비병이 방화수 양동이를 들어 끼얹자마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폭탄처럼 터졌다. 그로 인해 중화상을 입은 채 선생은 동생 준식과 함께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기소되어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옥중 19년』 = 서승. 진실의 힘. 336쪽. 2018년 04월 03일

계몽주의 시대 백과전서파의 정의에 따르면 “미신적인 생각들로부터 태어나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이, 아니 오히려 일종의 기쁨과 만족감까지 느끼며 우스꽝스러운 행동이나 옳지 않은 행동, 잔혹한 행동을 저지르게 하는 맹목적이고 격정적인 열중”을 광신주의라 부른다. 레드 콤플렉스는 현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버티고 있는 광신주의 중 하나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서승 선생에게 이유 없이 살인적인 고문을 가한 배경이었고, 오늘날까지 이 땅에 남아 빨갱이 또는 종북이라는 이름의 실체 없는 적을 만들어 내는 증오의 원천이 되고 있다.

1983년 한 북한 규탄 집회 현수막에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김일성 새끼 불고기 해 먹겠다.” 아무도 그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대상이 바뀐 채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지금도 등장하며, 문구를 보며 카타르시스처럼 증오를 발산하는 군중의 모습도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 증오의 표적이 되면 대개 간담이 서늘해져 입을 다물어버리기 일쑤이고, 쉽게 겁먹고 기가 죽거나, 포악함과 공포에 대처할 방법을 몰라 자신이 무방비 상태라고 느껴 마비된 것 같은 상태가 되고 공포 앞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런 것이 증오가 가진 힘이다.(『혐오사회』, 24쪽)

▲ 『혐오사회』 = 카를린 엠케. 다산초당. 272쪽. 2017년 07월 18일

사회에 구조화된 증오와 분노에는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고 표면화되는 특정한 맥락이 있음을 간파한 카를린 엠케의 말이다. 그와 같은 증오의 이데올로기에 걸린 대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어 서승 선생의 경우처럼 끝없는 희생만을 강요당하기 일쑤다. 엠케는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오랜 전형을 구약성서에서 발견했다.

- 길르앗 군은 에브라임 지역의 요르단 강 나루를 차지하고 에브라임 사람이 도망치다가 건네 달라고 하면,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쉽볼렛”이라고 말해 보라고 하고 그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그 요르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 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판관기 12장 5-6절, 공동번역 개정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그것은 생존이 걸린 문제이자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였다(『혐오사회』, 132쪽).” 마찬가지로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시대에 국가 권력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으면 그것으로 그 상대는 법률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이 나라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야 했다. 빨갱이가 된 수인은 심지어 죽는 순간에조차 외면되어야 했다.

- 징역형은 살아있는 인간이 받는 형벌이다. 현재의 형법에도 “죽음에 다다른 수인은 형의 집행을 정지한다”라고 되어 있다. 아무리 중한 죄인이라도 “임종은 가족이 지켜보도록” 해주는 온정을 베푼다. (...) 그러나 비전향수에게는 최후의 온정도 베풀지 않아, 바로 옆에 있는 병사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독방귀신이 되는 일이 거반이다.(『옥중 19년』, 153쪽)

빗나간 역사의 잔재, 깨어난 시민의 힘

레드 콤플렉스는 그 빗나간 증오로 인해 현실을 종종 희화화시키는데, 막걸리 반공법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황해도 출신인 사람이 북한의 황주 사과가 남한의 대구 사과보다 맛있다고 말하면 국가보안법(반공법) 상 찬양·고무죄로 잡힌다. 도시 철거반에게 무허가 주택을 철거당한 사람이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마찬가지다.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은 세상에 없는데,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라 했으니 김일성을 찬양했다는 말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엠케의 말처럼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계속 심화되고 확대되어 결국 모든 사람이 해를 입는(『혐오사회』 24쪽)” 지경으로 치달았다. 가령 서승 선생이 책에서 밝힌 이런 경우들이다.

하원차랑(河源次郞) 씨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에 부모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귀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입국해 토목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장 밑에서 일한 것이 죄가 되어 1983년에 이빨이 부러지도록 고문을 당하고 해외취업노동자 간첩단의 주범이 되었다. 그는 박정희의 숭배자이며 민주공화당 당원연수원 2기생이었다고 뽐내던 사람이었다.

이민수 군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구두닦이, 신문배달 등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인간 취급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38선을 넘으려다 잡혀 5년형을 받았다. 1974년 정권은 있지도 않은 빨갱이 사상에서 전향시킨다며 그에게 고문을 가했다. 간수들은 “건방지게 도둑놈 주제에, 너 같은 놈이 무슨 빨갱이야!”라며 조롱했고, 그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버티다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처럼 살기 위해 전향해도 사회는 그를 자신의 일원으로 품어주지 않았다.

때문에 거꾸로 자진해서 빨갱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감옥에서 가끔씩 “김일성 만세!” 하고 외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은 문제를 가진 죄수가 추가 형을 받으려고 낸 소리였다. ‘꼴통’이라는 평을 얻으면 간수가 간섭을 하지 않아 담배를 팔 수도 있고 운동화를 신을 수 있고 머리를 기를 수도 있었다. 말썽을 피우고 간수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다 끝까지 참아 드디어 “녀석은 사내놈이다”라는 평을 얻어도 마찬가지였다.

서승 선생은 그런 와중에 끝끝내 전향을 거부하여 만기 없는 구속의 날을 버텼다. 종이 한 장 써내면 나갈 수 있는 감옥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묵묵히 눌러 앉아 있다 1990년 2월 28일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형과 함께 구속되어 무기형을 견뎌 냈고 1987년 반인간적인 사회안전법과 사상전향제도에 항의하여 무려 51일간 단식했던 동생 서준식 선생도 풀려나 형제 상봉을 이루었다.

레드 콤플렉스는 국민을 무한 증오의 희생물로 삼아 영구 집권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 반공 정권의 유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 잔재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촛불 혁명으로 국가 권력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 유령을 살려내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엠케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통해 권력의 본성을 들려 줌으로써 시민들이 그러한 시도를 끝장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권력은 사실 그 누구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그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것이다.”(『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위 엠케의 책 250쪽)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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