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어제 저녁 사고나 질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불운과 사랑의 작대기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고뇌를 빼면 아무 갈등도 불행도 없는 세상에서 상위 0.01% 지능지수와 그에 비례한 착함을 장착한 엘리트들이 즐거운 밴드생활 하는 걸 보려고 4인 가족이 모처럼 모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화여.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네 개의 입은 월드콘이나 새우깡 씹으랴 드라마 씹으랴 몹시 바빴다. 40개의 손가락은 가끔 손가락질 하는 데 쓰일 뿐 좀 한가했다. 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중지를 모았다. 우리 가족도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해서 쓰자.
이미 90%의 가구가 신청해 12조원 가량이 풀려 경기진작 효과가 운위되는 판에 이 무슨 뒷 북이냐고? 자기가 소득 하위 70%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 지지자/눈치보는 이들 그리고 기부와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 세 범주의 합집합에 속한 이들 중에 약간의 심적 갈등이 엿보이니 그걸 좀 풀어보자.
나는 대강 세 집단의 교집합에 속한다. 그래서 고민이랄 게 없었다. 공돈 생기면 기쁘겠지만 안 받아도 그만이고 신청하기 귀찮은데 신청 안 하면 기부한 걸로 인정된다니, 정부가 특별법까지 만들어 기부를 하라니 힘도 실어줄 겸 기부하지 뭐, 기부 착하고 좋잖아, 뭐 이렇게.
왜 가구별이고 왜 세대주 신청이야 하는 반감은 들었다. 세대주라는 단어 자체가 고색창연하게 들리고 이 뭔 가부장제 발상인가 싶고. 급하다는데, ‘긴급’인데 그냥 개개인에게 25만원씩 주면 간단할 걸. 헤어져 사는 가족 다시 이어주려고? 생활력 없는 세대주 힘 실어주려고?
조금 머리가 돌자 아차, 난 보편복지론자인데?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소득 재산과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일정액을 지급하자는 입장과 소득 하위 70% 가구만 주자는 입장이 대립했었다는 건 다 아는 얘기.
전국민에게 주되 재정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자발적 기부를 유도하자고 한 결정은 양 쪽의 입장을 재봉틀로 드르륵 박은, 안이한 타협으로 보이기는 했다. 원칙적인 입장 차이를 사소화하기? 홍남기(경제부총리)의 돌출행동은, 우리 정부는 이렇게 건강한 토론문화를 자랑한답니다, 하며 넘어가는 것 같고.
그러면서 전체 가구 중 10~20%가 기부에 참여해 1조 4천억에서 2조 8천억 정도 기부금이 모일 것으로 예상한 모양. 그 기부금을 고용보험 기금으로 돌려 실업사태 지원에 쓴다고 하고.(경향신문 4월 30일 4면 보도)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치 국물부터 마시는 건 자기 마음이지만 그러면서 슬며시 기부금 목표치가 설정된 것은 아닐는지. 그 목표 달성하려고 은근 압박을 가하는 건 아닌지. (한 예로 대기업 중간간부, 눈치 보느라 신청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젊은 층이 기부를 더 찬성한다는 텔레비전 뉴스도 나오고.
카드사들은 수없이 문자질 하며 재난지원금 신청하라고 극성을 떠는데(난 세대주가 아니요 하고 답문자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정부는 뭐 별로?
행정안전부에서 만든 안내문 한 장 달랑 우체통에 넣고 끝. 심지어 인터넷 신청 페이지에 꼼수를 부려 실수로 기부하게 하고. (의도적 꼼수는 아니었겠으나 일하는 공무원 머리에 기부 기부기부가 박혀 있던 것은 분명하다.)
나라 살림 걱정인지 자기가 낼 세금 걱정인지 여러 걱정이 자심한 분들, 소득 하위 70%만 선별해서 역누진으로 자상하게 한 땀 한 땀 나눠 주자고 했던 분들, 자기 신조에 충실하게 재난지원금 안 받아들 가셨지요?
나는 왜 보편복지론자면서 재난지원금 받을 생각을 안 했을까요. 이건 뭐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뛰는 건가요.
무엇보다 그것을 긴급구호금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살만큼 사는’ 이들이 재난지원금을 받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그러나 그것을 꽁꽁 얼어붙은 소비를 풀어 경제가 돌아가게 하는 마중물로 보면 전국민이 모두 받아 빨리 쓰는 게 맞다. 재난은 물도 아니면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니 되도록 소상공인들 장사를 돕게 쓰면 좋겠지. (유명 셰프가 하는 우동집은 미어터진다. 장사 안 되는 집에 가서 맛없는 걸 사먹는 게 코로나 영웅? 영웅 하기 원래 쉽지 않지.)
둘째, 기부는 좋은 것이여 고정관념에 지배된 탓. 그러나 국가가 기부를 받는 것은 이상하다. 나라가 쓸 돈은 법에 따라 체계적으로 걷는 세금으로 조달하는 게 맞다. 위기 때마다 금모으기 운동하는 것 촌스럽다. (우리, 선진국이여요.) 나라살림을 개인의 선의에 의존하다니 아마추어도 아니고..... 실업문제 해결에 드는 돈이 헐크 바지?
재난지원금은 취지에 맞게 받아 쓰고 다른 돈이나 절약되는 돈으로 알아서들 기부를 하면 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난민 돕는 엔지오에 반을 기부하기로 했다. 정기 기부하는 단체에서 코로나19 관련 일회성 추가 기부 요청 문자가 와서 그것도 했다.
내 자랑을 하자면 예술인들 어렵다는 신문 기사 보고 옛날 도자기 선생께 연락했더니 다행히! 찜질방 일자리 구해서 알바한다기에 묵은 작품 몇 점 샀다. 자기랑 교대하는 또 다른 알바는 소설 쓰는 이라고. 앗 소설은 사 줄 수도 없고 어쩌나.
그러나 이 알량한 선의, 변덕스런 마음에 의존하여 무슨 변화를 도모할까. 우연히 눈에 띤 작은 틈새 한 번 물칠하기 정도? 나라 차원의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고 레귤러하게 돌아가야 한다. 재난 지원, 경제 살리기, 코로나 극복, 그 무엇이 됐든.
세금 걱정들 하던데 세금 더 내는 것 좋아할 사람 없을 것. 그러나 30만원 주고 30만원 이상을 세금으로 떼어갈 리 없고 30만원의 추가 세금을 걱정할 인구층은 제한적이다. 장사 안 돼 끌탕하는 이들, 세금 낼 일 있으면 좋겠네요 할 걸. 코로나 초기에 세금 감면 세금 혜택 어쩌고 할 때 웃기지도 않았다. 뭘 벌어야 세금을 내지.
별로 세금 낼 일 없을 것 같은 행색의 중늙은이들이 동네 배드민턴장에 모여 세금폭탄 어쩌고 하는 것 보면 실소만 나온다. 골프 치며 세금 걱정 하면 미우면서도 들어주고 위로는 하겠으나. (어쩌겠어요 시대가 변했는데...) 앞으로 증세논의가 있을텐데 누가 무슨 말 하면 그의 계급이 뭔지 좀 살펴보자.
셋째, 기부를 해서 기부하라고 하는 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생각. 마음이 가상하기는 하나 유례없는 대통령 지지도를 보면 걱정도 팔자인 거다. 긴급재난지원금을 90%, 95%, 99% 받아가는 것이 정부 실패일 리 없다. 애초 기대보다 기부액이 택도 없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야 봐라 모두에게 주는 게 맞지 해야지.
그나저나 911 때 미국 대통령이 앉아서 나라 걱정하지 말고 나가서 돈 쓰라고, 소비하라고, 경제를 돌리라고, 그게 애국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어쩌다 이렇게 절약이 미덕이 아닌 체계에 모두 붙잡혀 있게 되었는지 걱정이지만 너무 심오하게 들어가니 머리가 아프구나, 이만 총총.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이코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