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어제 저녁 사고나 질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불운과 사랑의 작대기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고뇌를 빼면 아무 갈등도 불행도 없는 세상에서 상위 0.01% 지능지수와 그에 비례한 착함을 장착한 엘리트들이 즐거운 밴드생활 하는 걸 보려고 4인 가족이 모처럼 모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화여.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 김미영 칼럼니스트

네 개의 입은 월드콘이나 새우깡 씹으랴 드라마 씹으랴 몹시 바빴다. 40개의 손가락은 가끔 손가락질 하는 데 쓰일 뿐 좀 한가했다. 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중지를 모았다. 우리 가족도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해서 쓰자.

이미 90%의 가구가 신청해 12조원 가량이 풀려 경기진작 효과가 운위되는 판에 이 무슨 뒷 북이냐고? 자기가 소득 하위 70%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 지지자/눈치보는 이들 그리고 기부와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 세 범주의 합집합에 속한 이들 중에 약간의 심적 갈등이 엿보이니 그걸 좀 풀어보자.

나는 대강 세 집단의 교집합에 속한다. 그래서 고민이랄 게 없었다. 공돈 생기면 기쁘겠지만 안 받아도 그만이고 신청하기 귀찮은데 신청 안 하면 기부한 걸로 인정된다니, 정부가 특별법까지 만들어 기부를 하라니 힘도 실어줄 겸 기부하지 뭐, 기부 착하고 좋잖아, 뭐 이렇게.

왜 가구별이고 왜 세대주 신청이야 하는 반감은 들었다. 세대주라는 단어 자체가 고색창연하게 들리고 이 뭔 가부장제 발상인가 싶고. 급하다는데, ‘긴급’인데 그냥 개개인에게 25만원씩 주면 간단할 걸. 헤어져 사는 가족 다시 이어주려고? 생활력 없는 세대주 힘 실어주려고?

조금 머리가 돌자 아차, 난 보편복지론자인데?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소득 재산과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일정액을 지급하자는 입장과 소득 하위 70% 가구만 주자는 입장이 대립했었다는 건 다 아는 얘기.

전국민에게 주되 재정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자발적 기부를 유도하자고 한 결정은 양 쪽의 입장을 재봉틀로 드르륵 박은, 안이한 타협으로 보이기는 했다. 원칙적인 입장 차이를 사소화하기? 홍남기(경제부총리)의 돌출행동은, 우리 정부는 이렇게 건강한 토론문화를 자랑한답니다, 하며 넘어가는 것 같고.

▲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현장신청 첫날인 18일 오전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세류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시민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뉴시스

그러면서 전체 가구 중 10~20%가 기부에 참여해 1조 4천억에서 2조 8천억 정도 기부금이 모일 것으로 예상한 모양. 그 기부금을 고용보험 기금으로 돌려 실업사태 지원에 쓴다고 하고.(경향신문 4월 30일 4면 보도)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치 국물부터 마시는 건 자기 마음이지만 그러면서 슬며시 기부금 목표치가 설정된 것은 아닐는지. 그 목표 달성하려고 은근 압박을 가하는 건 아닌지. (한 예로 대기업 중간간부, 눈치 보느라 신청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젊은 층이 기부를 더 찬성한다는 텔레비전 뉴스도 나오고.

카드사들은 수없이 문자질 하며 재난지원금 신청하라고 극성을 떠는데(난 세대주가 아니요 하고 답문자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정부는 뭐 별로?

행정안전부에서 만든 안내문 한 장 달랑 우체통에 넣고 끝. 심지어 인터넷 신청 페이지에 꼼수를 부려 실수로 기부하게 하고. (의도적 꼼수는 아니었겠으나 일하는 공무원 머리에 기부 기부기부가 박혀 있던 것은 분명하다.)

나라 살림 걱정인지 자기가 낼 세금 걱정인지 여러 걱정이 자심한 분들, 소득 하위 70%만 선별해서 역누진으로 자상하게 한 땀 한 땀 나눠 주자고 했던 분들, 자기 신조에 충실하게 재난지원금 안 받아들 가셨지요?

나는 왜 보편복지론자면서 재난지원금 받을 생각을 안 했을까요. 이건 뭐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뛰는 건가요.

무엇보다 그것을 긴급구호금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살만큼 사는’ 이들이 재난지원금을 받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 20일 서울 성동구 마장축산물시장에서 성동구청 직원이 정부긴급재난지원금으로 한우를 구입하고 있다. (사진=성동구 제공)

그러나 그것을 꽁꽁 얼어붙은 소비를 풀어 경제가 돌아가게 하는 마중물로 보면 전국민이 모두 받아 빨리 쓰는 게 맞다. 재난은 물도 아니면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니 되도록 소상공인들 장사를 돕게 쓰면 좋겠지. (유명 셰프가 하는 우동집은 미어터진다. 장사 안 되는 집에 가서 맛없는 걸 사먹는 게 코로나 영웅? 영웅 하기 원래 쉽지 않지.)

둘째, 기부는 좋은 것이여 고정관념에 지배된 탓. 그러나 국가가 기부를 받는 것은 이상하다. 나라가 쓸 돈은 법에 따라 체계적으로 걷는 세금으로 조달하는 게 맞다. 위기 때마다 금모으기 운동하는 것 촌스럽다. (우리, 선진국이여요.) 나라살림을 개인의 선의에 의존하다니 아마추어도 아니고..... 실업문제 해결에 드는 돈이 헐크 바지?

재난지원금은 취지에 맞게 받아 쓰고 다른 돈이나 절약되는 돈으로 알아서들 기부를 하면 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난민 돕는 엔지오에 반을 기부하기로 했다. 정기 기부하는 단체에서 코로나19 관련 일회성 추가 기부 요청 문자가 와서 그것도 했다.

내 자랑을 하자면 예술인들 어렵다는 신문 기사 보고 옛날 도자기 선생께 연락했더니 다행히! 찜질방 일자리 구해서 알바한다기에 묵은 작품 몇 점 샀다. 자기랑 교대하는 또 다른 알바는 소설 쓰는 이라고. 앗 소설은 사 줄 수도 없고 어쩌나.

그러나 이 알량한 선의, 변덕스런 마음에 의존하여 무슨 변화를 도모할까. 우연히 눈에 띤 작은 틈새 한 번 물칠하기 정도? 나라 차원의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고 레귤러하게 돌아가야 한다. 재난 지원, 경제 살리기, 코로나 극복, 그 무엇이 됐든.

세금 걱정들 하던데 세금 더 내는 것 좋아할 사람 없을 것. 그러나 30만원 주고 30만원 이상을 세금으로 떼어갈 리 없고 30만원의 추가 세금을 걱정할 인구층은 제한적이다. 장사 안 돼 끌탕하는 이들, 세금 낼 일 있으면 좋겠네요 할 걸. 코로나 초기에 세금 감면 세금 혜택 어쩌고 할 때 웃기지도 않았다. 뭘 벌어야 세금을 내지.

별로 세금 낼 일 없을 것 같은 행색의 중늙은이들이 동네 배드민턴장에 모여 세금폭탄 어쩌고 하는 것 보면 실소만 나온다. 골프 치며 세금 걱정 하면 미우면서도 들어주고 위로는 하겠으나. (어쩌겠어요 시대가 변했는데...) 앞으로 증세논의가 있을텐데 누가 무슨 말 하면 그의 계급이 뭔지 좀 살펴보자.

▲ 13일 오후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의 한 그릇상점에 긴급재난지원금 사용 시 할인한다는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뉴시스

셋째, 기부를 해서 기부하라고 하는 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생각. 마음이 가상하기는 하나 유례없는 대통령 지지도를 보면 걱정도 팔자인 거다. 긴급재난지원금을 90%, 95%, 99% 받아가는 것이 정부 실패일 리 없다. 애초 기대보다 기부액이 택도 없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야 봐라 모두에게 주는 게 맞지 해야지.

그나저나 911 때 미국 대통령이 앉아서 나라 걱정하지 말고 나가서 돈 쓰라고, 소비하라고, 경제를 돌리라고, 그게 애국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어쩌다 이렇게 절약이 미덕이 아닌 체계에 모두 붙잡혀 있게 되었는지 걱정이지만 너무 심오하게 들어가니 머리가 아프구나, 이만 총총.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이코노뉴스]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