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한필이 칼럼니스트] 세상에 불기운이 가득해서인지 나라 안팎으로 화재도 많고, 산불도 자주 보입니다.

날은 날대로 가물어서 속 타는 백성들도 늘어만 갑니다. 이런 즈음에 잠시 찬 마루바닥에 배 깔듯이 심신을 서늘하게 적셔주는 시 한편이 생각납니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우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라치고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어린 시절 해 질 무렵 졸졸대는 여름 냇가에서 발목에 차던 물기운이 살아납니다. 그 생생함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던 것일까요? 오늘은 마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대학

傳文7

정심수신(正心修身)

心不在焉(심불재언) 視而不見(시이불견) 聽而不聞(청이불문)

食而不知其味(식이불지기미)

此謂修身(차위수신) 在正其心(재정기심)

해석하면 이렇다고 합니다.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래서 자신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 한번 해볼까요? 콩깍지에 씌우면 눈에 보이는 것이 평소에 보던 것이랑 많이 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에 둔 여인이 친구들과 재잘대며 몰려가면 50미터 떨어져서도 순간적으로 유독 그녀한테만 급속 줌인(Quick Zoom-In)이 됩니다. 그녀만 환하고 그녀의 주변은 블랙으로 바뀌죠.

혹은 그녀의 상반신 주변이 만화 속에서나 보던 욱일승천기 부채살이 쫙 퍼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식은 땀을 흘리며 마침내 인정하게되죠. "이거 큰일 났구나! 사랑이구나!"

어떤 때는 고속도로에서 멀리 보이는 산 위에 펼쳐진 넓디 넓은 하늘에 그녀의 얼굴이 어마 어마한 크기로 나타납니다. "이게 뭐냐, 소인국에 간 걸리버인가!" 이런 현상은 비싼 대학교 등록금 내고 객관적 이성 훈련을 받은 이한테 일어나면 혼란은 더욱 커집니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법에 걸린겁니다.

​반대도 있지요. 이별의 순간이 오면 그간 나누었던 사랑의 달콤함이 모두 독으로 변합니다. 지옥불에 던져진 듯 숨도 제대로 쉬기도 힘듭니다. 온 몸을 면도칼로 그어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울부짖습니다. "그래, 마침내 깨달았구나! 석가모니가 말한 애별리고(愛別離苦)를!"

​이런 조화경을 부리는 그 물건을 바로 마음이라고 부르지요. 물질적으로 아무런 변환이 없는 눈이 어떻게 빠른 속도로 팍 가서 꽂힐 수 있나요. 면도칼이 없는데 어떻게 온몸에 통증을 느끼나요. 일순간 꿀이 독이 되고, 시공간 축소나 확장 현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나요.

이 격랑을, 이 널뜀을, 이 침잠을, 이 공포를, 이 환희를 다 그 물건이 합니다.

이 물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물건에 끌려다니며 놀아나지 않으려면 단단히 틀켜쥐어야 하는데 이것이 틀켜쥐면 쥘수록 더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고요히 그쳐 놓아버리면 서기도 하고 눕기도 하면서 서서히 얌전해 집니다.

마치 들로 풀 먹이려 데리고 나간 소 같지요. ​처음 시로 돌아가 '물 아래 그림자 지니'가 되려면 수면이 고요해야겠지요. 그리고 거기 비추인 참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스님이 되겠죠. 부른 이가 내가 되니까

​사실은 스님이 곧 나입니다. 부른 이나 부름을 당한 이나 사실은 한 몸인거죠. 그래서 이제 현상 속의 내가 본질속의 나에게 묻습니다. "여보게 이 사람아, 나라고 부르는 사람아, 자네 지금 어디로 가는가?"하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흰구름을 가리킵니다. "나는 순간과 찰나로 가네. 그래서 영원으로 간다네." 돌아도 안보고 갑니다. 내가 나에게 돌이켜 묻는 것. 그것이 자신을 닦아간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려면 물 아래 그림자 져야 합니다. 그 순간이 바른 마음이다 할 수 있겠지요.

오늘 퇴근길에는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로 불마음을 달래줘야겠습니다. 저녁 바람이 선선한 것이 안주가 참 맛있어 보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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