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임진왜란 종전 무렵인 1597년 30세의 젊은 선비 수은 강항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그의 학문적 재능은 당시 일본 최고의 지식인이며 승려인 6년 연상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감복케 했다.

그는 강항이 퇴계의 ‘제자의 제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승복을 벗어던지고 퇴계학의 신봉자가 되었다. 이후 새로 출범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의 스승이 되어 막부가 문치로 흐르는 단초를 열어 놓았다. 이후 퇴계학은 일본에서도 면면히 이어졌다.

▲ 지난달 27일 충북 단양군 문화체육센터에서 퇴계 이황 선생 추념 전국 서예대회가 열리고 있다./단양군 제공

일본인이 생활화한 퇴계의 언행을 살펴보자.

첫째, 퇴계의 경(敬)과 성(誠)의 일상화이다. 일본인의 친절과 예의 그리고 규율을 잘 지키는 것은 경의 습관이고 체질화한 생활이다.

둘째, 폐 안 끼치는 체질이다. 일본인은 남에게 폐를 안 끼치는 것을 가장 큰 도덕률로 삼고 있다.

가정교육에서 가장 중시하는 게 바로 집 밖에 나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단련시키는 일이다. 퇴계는 평생 폐 끼치지 않는 원칙을 사생활과 공직생활에서 지켰고 또 가르쳤다.

셋째, 자기 집을 방문한 사람과 초대한 사람은 반드시 차나 음식 대접을 하고 초대한 사람의 식구를 위해 음식물을 들려 보낸다. 받은 만큼 갚는 것도 퇴계의 사수법과 같다.

넷째, 일본인의 문장 작법은 퇴계로부터 영향이 크다고 일본학자가 증언한다.

다섯째, 퇴계의 정좌법(靜坐法)이 일본인의 생활습관이 되었다. 일본인은 꿇어 앉아 ‘팔(八)’자형으로 손을 짚고 절을 한다. 경북 안동 지방과 퇴계학 영향권에서는 모두 이와 같이 절을 한다.

퇴계의 예법 원형이 일본에서 그대로 지켜져서 잘 전해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일본인의 국민성과 생활문화를 정리해보면 성, 경의 일상화, 공사 간 폐 안 끼치기, 예절과 물품 사수, 심지어 문장 작법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 퇴계의 실행 유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잊고 잃어서 낭패한 것을 일본은 지켜 이어와 경제적 부와 윤리도덕 생활을 함께 누리는 밑바탕이 되었다니 깊이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물질적으로 풍족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의와 염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웃나라로부터 ‘동방예의지국’, ‘군자의 나라’라고 칭송 받기도 했다. 왕조도 세워지면 500년 이상 지속했다.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 조선 왕조도 500년 이상 지속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장수 국가였다. 그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조선은 문치국가이므로 무력이 센 나라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권력을 가진 관료가 힘으로 백성을 장악하고 통치하지도 못했다. 민란이 자주 일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마을마다 고을마다 가르침을 주고 이끌어 주는 존경받는 선비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몸을 닦고 솔선수범하였기에 백성들이 교화되어 따랐다. 나라 전체의 관점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큰 선비가 있었다.

그들은 사회적 책무를 다함으로써 지도층으로 추앙되었다. 조선은 이처럼 추앙받는 선비가 백성을 이끌어 나가는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선비는 누구인가. 국어사전에는 “선비는 학덕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으로 풀이되어 있으나 그렇게 좁은 의미로 쓸 일은 아니다.

벼슬길에 나아갔다고 해서 퇴계나 율곡 이이같은 대(大)유학자를 선비의 반열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양반, 사대부 중에서 일생동안 도덕적 원칙을 추구하며 공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학자 지식인이며 나아가면 관료 정치인이요 교육자요 언론인이었다.

선비들은 배운대로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선비 정신이 그들로 하여금 불의를 보고 못 본 체 할 수 없게 했다. 오늘날의 지식인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의 궤적과는 현격한 차이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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