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오전 7시 서울을 떠난 관광버스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영동고속으로 진입해 여주에서 중부내륙을 갈아탔다.

행선지는 죽령옛길. 고려시대 경북 안동에서 개경 쪽으로 올라오는 옛고개다. 전에는 청량리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충북 단양을 지나 경북 영주를 거쳐 안동까지 가던 길이다. 옛길이 남아있다니 신기했다. 조선시대는 경주, 안동이 시들고 영남관찰사가 있던 대구 주위의 선비들은 문경새재(조령)를 넘어 한양으로 왔기 때문에 죽령은 한산해졌다.

▲ 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토요일(27일) 충북 제천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단양을 거쳐 5번국도인 죽령고개를 오르니 영주시였다. 인삼이 유명한 풍기읍이 시작됐다. ‘영남제일관’이라는 문루와 ‘죽령주막’이라는 음식점은 있었으나 죽령옛길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고불고불한 고개를 내려가 희방사 입구에서 내렸다. 희방사역(喜方寺驛) 간판이 소백산역으로 바뀌고 철로옆으로 난 길이 보부상들이 다니던 옛길이란다.

푸른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떡갈나무와 활엽수가 푸르른 죽령옛길을 올랐다. 희방사역에서 죽령고개까지 2km의 좁은 계곡길이다. 영남이라는 이름의 영(嶺·고개)은 죽령이 시초였다. 이어 조령, 임진왜란 이후에는 침략길이었던 추풍령이 대구, 부산으로 내려가는 영남의 주관문이 됐다.

신라초기부터 경주에서 안동을 거쳐 북쪽 지방이나 강원도와 북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2000년간 이어져온 것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는 기록이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해발 689m의 ‘대재’, 조선후기 <동국여지승람>에도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 순사했고 고갯마루에는 그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 죽령사(竹嶺祠)라는 사당이 단양, 풍기를 잇는 정상에 주막과 함께 세워졌다. 이날도 향토인들이 관광객들의 축원을 받아 금줄에 고유제와 축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일제가 합방 전인 1904년 부산, 대구, 대전, 서울을 잇는 빠른 경부선을 만든 이후 이 길은 거의 잊혀졌다. 이후 1930년대 초 강릉 삼척으로 가는 철도와 태백산, 소백산 지역의 중석광, 탄광, 석회석광 등 전략물자 공급을 위해 안동 지역으로 내려가는 중앙선을 개통했다.

▲ 죽령옛길 재현행사/경북 영주시 홈페이지 캡처

이어 영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동해선을 연장시켰다. 대학 때 “3등 3등 완행열차를 타고..,고래잡으러” 동해로 가기 위해 청량리역에서 저녁기차를 타면 자정쯤 지나는 곳이 ‘똬리굴’의 죽령역과 희방사역이었다.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龍夫院里)에 있는 죽령역에서 희방사역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는 길이 4500m의 죽령터널(똬리굴)을 통해 산허리를 통과한다. 중앙고속도로 단양~풍기 구간에도 죽령터널이 있다.

터널 북쪽 입구 부근에 제2 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비경으로 이름난 계곡과 우거진 수목 터널이 이어지는 명승지로 2007년 12월 17일 명승 제30호로 지정됐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다. 장수왕의 남진으로 5세기 이후 충주, 단양을 거쳐 영주 안동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었다.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단양 지역 남한강 부근의 10개 고을을 빼앗았다.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이 지역을 회복했다.

<삼국사기>에는 평강 공주의 남편인 온달 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죽령 북쪽 남한강 절벽에 아직도 남아있는 ‘온달산성’과 충주의 고구려탑등이 이 지역이 삼국 쟁투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죽은 온달의 관이 눈을 못 감고 움직이지 않아 평강 공주가 와서 데려갔다는 한강의 하류 서울 아차산의 전설이 연결되어 전해온다.

▲ 충북 단양군 온달관광지에서 열린 '2010 단양온달문화축제'에서 온달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복장을 한 출연진이 무술을 선보이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태백산맥이 대관령을 경계로 동해 지역을 영동지방, 또는 관동지방으로 불리었듯이 소백산맥의 죽령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이었다.

단양쪽 용부원리 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한 산신당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죽령산신당은 국사당이며, 해발 400m 정도의 당산 산마루 정상에 목조기와 건물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죽령산신제의 제사 대상은 죽령산신인 ‘다자구할머니’를 모신다. 죽령산신당을 ‘다자구할머니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할머니가 이 일대를 괴롭히던 산적들이 자면 “다자구야” 안자면 “덜자구야”라고 불러 관군이 소탕하게 됐다는 설화다.

제사일은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의 상순에 택일했다. 태백산신제와 마찬가지로 정월에도 고유제(告由祭)가 행해졌다. 죽령산신제는 현재도 마을 단위의 제사로 전승되고 있다.

2시간 걸어올라 영남제1관에서 땀을 식혔다. 식사 후 1시간 길인 영주 부석사관광을 하고 귀경길은 좀 막혀 3시간 남짓 걸렸다.

경부고속에 진입하니 버스전용차선인 1차선에 북한, 중국, 러시아로 이어지는 ‘아시안하이웨이’ 간판이 보였다. 2000년전 죽령길이 뚫려 북한지역까지 갈수 있었는데 아직도 우리의 길은 휴전선에서 막혔다. 길은 더 막혔다. 역사는 발전하고 더 자유로워지는가?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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